'자크린의 눈물' 선율 속 시각장애인이 고된 세상 위로한다

손영옥 2022. 10. 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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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립미술관 조르주 루오展
한국서 13년 만에 200여점 전시
동판화 연작 '미제레레' 깊은 울림
‘20세기 유일한 종교 화가’로 불리는 조르주 루오 개인전이 13년 만에 한국을 찾아 전남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흑백 동판화 연작인 ‘미제레레’의 ‘때때로 장님이 눈이 보이지 않는 자를 위로했나니’(1926년), ‘하나님,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922년).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 그의 팔을 붙잡고 부축하는 이는 놀랍게도 눈 먼 장인이다. 이렇듯 때때로 장님이 눈이 보이는 자를 위로 하는 것 같은 순간이 우리에겐 있다. 인체를 감싸는 검고 굵은 윤곽선이 슬픔을 감싸는 듯한 이 작품은 ‘20세기 유일한 종교화가’로 불리는 조르주 루오(1871~1958)의 동판화 작품 ‘미제레레(주여, 불쌍히 여기소서)’(1927) 연작의 하나다. 전시장에는 오펜바하의 ‘자크린의 눈물’의 애절한 선율까지 흘러 종교적 공간에 온 듯한 위로를 건넨다.

조르주 루오가 한국에 왔다. 2006년 대전시립미술관, 2009년 예술의전당 전시에 이어 한국에서 루오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기는 13년 만이다. 2006년 대전 전시는 지역에서 열렸고 SNS 같은 강력한 전파 매체도 없었는데도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번에는 전남 광양에 위치한 신생 전남도립미술관에서 한다. ‘인간의 고귀함을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번 전시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와 루오재단 소장품 중 엄선된 200여점이 왔다.

루오는 야수주의 창시자 앙리 마티스(1869∼1954)와 동시대를 살았다. 함께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마티스가 색이 주는 즐거움, 생의 환희를 노래한 것과 달리 루오의 그림에서는 인생의 고단함을 감싸는 따뜻함과 종교적인 울림이 있다.

루오는 파리의 가난한 가구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순수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파리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스테인드글라스 견습공으로 일했다. 루오의 작품이 보여주는 밝은 색채를 감싼 굵고 검은 테두리 선은 그때 익힌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방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장미라 전남도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설명했다.

루오는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를 스승으로 만났다. 루오는 나이 27세 때인 1898년 정신적 지주인 스승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았고 방황의 시기를 거쳐 수도원에 입회하게 된다. 이때 만난 소설가이자 미술비평가 위스망스의 영향으로 사회비판적인 사고와 종교적인 신념을 작품 세계에 투영하며 화가로서 전환점을 맞는다.

루오는 파리 코뮌이 등장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심했던 파리의 비참한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렸다. 창녀와 빈민, 노동자, 피에로와 광대 등 밑바닥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의 장면에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 미술학교에서 배운 아카데미 화풍을 버리고 인체 묘사를 생략하는 거칠고 빠른 붓질, 배경과 형태를 분리하는 검은 윤곽선을 쓰는 특유의 양식을 구축했다. 루오의 그림은 풍경조차도 인간의 내면을 담았다.

루오 특유의 검고 굵은 윤곽선과 초록과 주황의 주조색으로 인해 따뜻하면서 뭔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는 인물과 정물, 풍경 등이 마음을 건드린다. 동시대 비평가 앙드레 쉬아레스가 “루오는 형태보다는 정신을 표현한 작가”라고 평가한 이유를 알거 같다.

하이라이트는 종교화다. 특히 흑백 동판화 연작인 ‘미제레레(Miserere)’ 58점이 나왔다.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으로 인해 인간이 겪은 참혹한 죽음과 고통에 공명하며 이 판화를 제작했다. 울부짖는 인간과 인간을 구원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흑백이라 더욱 울림을 갖는다. 동판화임에도 이토록 어루만지는 듯한 표면을 만들어낸 기법이 놀랍다.

유화 작품 ‘어린 피에로’(1945년경).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또 다른 재미는 광대다. 서커스와 광대는 어린 시절 변두리 서커스 공연을 구경다니며 자유로워 보이는 광대의 삶을 부러워했던 루오가 평생 천착한 주제의 하나였다. 광대는 피카소 등 여러 작가가 즐겨 그렸다. 루오도 초기에는 그들을 슬픈 존재로 표현했지만, 점차 따뜻하고 선명한 색을 사용해 밑바닥 삶을 살지만 밝고 당당한 광대로 표현했다. “마차 한구석에 앉아 번지르르한 의상을 꿰매고 있는 늙은 어릿광대,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화려하고 눈부신 것들과 비극의 연속인 그의 인생의 대조…. 어릿광대, 그것은 ‘나’나 ‘우리’이다.” 루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구절처럼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관람객들은 루오가 그린 광대들에게서 자신의 자화상을 발견할지 모르겠다. 2023년 1월 29일까지.

광양=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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