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론성지 가보니.. 신자들이 왜 여기 숨었는지 알겠네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기자]
제천 시내 외곽에서 제천천을 따라 지나가는 5번 국도를 타고 원주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편으로 천주교 성지로 가는 길이 보인다. 이름은 배론성지. '배론'은 마을 계곡이 '배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오늘날 천주교 원주교구 성지와 피정시설인데, 사제·부제 서품식과 순교자 현양대회와 같은 교구 행사도 이뤄진다.
성지의 역사도 200년이 넘었다. 원래는 신유박해를 피해 들어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었는데, 황사영이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 최초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과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 이전 시기까지 한국 천주교의 개척과 수난사를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에는 천주교인들의 피난처이자 교우촌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배론성지로 가보자.
황사영 백서 사건과 성 요셉 신학당
배론성지는 제천 봉양읍 구학리에 있다.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에서 38번 충주방향으로 나가 봉양읍에서 원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자. 왼편에 있는 제천천을 따라 옛 구학역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현판을 따라 좌회전하면 배론성지에 도착한다.
배 밑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배론성지. 성지 주변을 보니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왜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피신을 했더라도 혹시나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관군들이 들이닥칠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옛 신자들이 떠오른다.
▲ 황사영이 신유박해를 피해 백서를 썼던 토굴. 1987년 서울대 역사교육과 이원순 교수의 고증을 통해 복원되었다. 현재 백서 원본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의금부에서 입수하여 교황청에 보내져 오늘날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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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성지 옹기가마. 신유박해를 피해 들어온 신도들의 생계수단이었다. 이들 중에는 옹기장수와 행상들도 있었는데, 옹기를 사고 팔면서 신앙촌 간 정보수집 및 공유와 안전유지에 큰 기여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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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사영 순교현양탑. 신유박해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서 후반부에 언급한 청나라와 서양 군대의 개입 요청은 조선 조정이 천주교 박해에 더 박차를 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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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양탑 오른편에 보면 황사영이 신유박해 이후 피신한 토굴이 있다. 이후 같이 배론으로 피난 온 황심을 만나 대책을 논의한 끝에, 토굴에서 흰 비단 위에 박해에 대한 전말과 대응책에 대한 검은 먹글씨 밀서를 작성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전달은 해마다 북경 동지사 일행에 끼어 들어오는 옥천희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북경에서 의주로 돌아오는 길에 옥천희는 체포되고 만다. 포도청에서 고문을 못 견딘 그는 황심과의 관계를 말하게 되고, 이후 황심과 황사영도 체포된다.
백서는 박해로 폐허가 되고 어려움에 처한 조선교회의 현실과 신유박해 때까지 이뤄진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후반부 문구들이 조선 조정을 경악케 했는데, 그중 일부를 살펴보자.
誠以此時命爲內服 混其衣服 通其出入 屬之於寧古塔 以廣皇家根本之地
진실로 이러한 때에 속국이 될 것을 명하여 그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왕래를 터놓아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시켜 황조의 근본이 되는 땅을 넓히십시오.
영고탑은 청나라의 기원지다. 즉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서양 배 수백 척과 정병 5, 6만을 대포와 날카로운 무기로 무장시켜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달라고 협박해주기를 희망했다. 이건 당시 반역죄에 해당되는 죄목이라, 조정의 천주교 박해가 더 거세지는 단초가 되었다. 물론 이런 어리석은 문구를 적은 황사영도 거열형에 처해졌다.
신유년 피바람이 일어난 지 50여 년 후 배론에 이방인들이 찾아오게 된다.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 메스트로가 자신의 집을 봉헌한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의 도움을 받아 1855년 황사영 토굴 근처에 성 요셉 신학당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직하여 전공을 신학과와 라틴어과로 나누었다. 동물, 식물, 지리학과 의술과 같은 과학지식과 일반상식도 가르쳤는데, 당시 조선에서 유일했던 서양식 근대학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년 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8명의 신학생을 배출할 수 있었지만,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장주기 그리고 세 명의 신학생이 한강 새남터에서 병인박해로 순교하면서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 배론 성 요셉 신학당. 오늘날 각지 가톨릭대 신학과의 모태가 되었다. 오늘날 신학당은 2003년 충청북도가 지원하여 복원했는데, 6.25전쟁 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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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 푸르티에 신부(좌)와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우). 두 신부는 1866년 병인박해로 순교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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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
성 요셉 신학당 건너에 또 다른 추모시설이 있는데,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과 기념성당이다. 조각공원에 가면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볼 수가 있다. 최양업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집안이었다. 15세에 파리외방전교회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6년 김대건과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전교회가 임시로 만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듬해 최방제는 위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 배론성지 최양업토마스신부기념성당. 배의 밑바닥을 형상화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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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당 왼쪽 소제단. 최양업 신부의 활동을 지도로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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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서품을 받기 전에도 김대건 신부가 25세의 나이에 병오박해로 순교하자, 조선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계속 이뤄졌지만 실패했다. 그러다가 서품을 받은 해 12월에 극적으로 조선으로 귀국하게 된다. 귀국 이후에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 127개의 공소를 모두 도보로 걸어 다니면서 사목활동을 했는데, 매년 7000리(약 2800km)를 걷는 도보 사목 생활을 무려 11년 6개월이나 계속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목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랜 기간의 박해 때문에 신자들의 고해성사가 밀려 있었던 데다가 신부 수가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 땀의 순교자로 살았던 생애를 그대로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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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성지를 나서며 본 문구. 최양업의 열번째 서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하느님의 자비를 무엇보다 강조한 내용인데, 이것이 진정한 한국 천주교의 뿌리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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