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맞아 그간 써둔 손글씨를 추적해봤습니다

이효연 2022. 10. 9.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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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관리, 은행업무, 손편지.. 연필과 펜이 필요한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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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연 기자]

한글날 황금연휴를 맞아 그동안 밀린 다이어리 정리를 하려고 얼마 전 새로 산 수첩 꺼내 들며 새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노트북과 휴대폰이 손글씨를 대신해서 손글씨를 거의 쓰는 일이 없구나' 여겨왔는데 의외로 제 하루 일상에는 늘 펜이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지요.

제 글씨에는 제 하루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제 하루가 그대로 담긴 손글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과를 되짚어가면서 시간에 따라 손글씨 서체가 변한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의외로 자주 사용하는 손글씨

저는 작은 하우스 콘서트가 열리는 와인바 겸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음식도 준비하고 저녁 시간에는 피아노 연주도 하면서 일인 다역을 맡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제 발길이 스쳐 가는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 제 손글씨가 흔적처럼 따라다니더군요.
 
▲ 1.원산지표기 식자재의 원산지와 유통기한등을 표기해 둔 손글씨
ⓒ 이효연
우선 아침에 출근해서 주방에 들어가 식재료를 준비하고 유통기한 등을 다시 한번 체크하면서 냉장고마다 붙여 둔 원산지표에 기입을 합니다. 이때엔 쓰고 지울 수 있는 마커 펜을 사용합니다. 손글씨가 좀 불안정하게 써지는 단점은 있지만 눈에는 잘 띄기 때문이지요. 이 글씨가 하루를 시작하는 저의 첫 손글씨입니다.
이렇게 영업 준비를 마치고 나면 정신없이 바쁜 점심시간이 시작됩니다. 이때 주방은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쉼 없이 밀려 들어오는 주문표를 홀더에 붙이고 어떤 음식이 완료되었는지, 중간에 변동이 있는 주문사항은 없는지 확인을 하며 조리를 합니다. 실수를 하게 되면 큰일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펜으로 체크를 하면서 조리를 해야 해요. 글씨가 예쁠 수가 없어요.
 
▲ 2점심오더 홀에서 전달된 주문표에 붉은 펜을 사용해 손글씨로 메모를 합니다
ⓒ 이효연
그렇게 폭풍 같은 점심 영업이 끝나고 나면 브레이크 타임이 돌아옵니다. 오후 3시에서부터 두 시간은 쉬면서 재충전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준비하는 작은 하우스 실내악 콘서트 준비를 위해 피아노 연습도 합니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가곡의 밤을 기획하고 있어서 그 반주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때에도 손글씨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하는 즉흥 연주는 악보가 필요 없지만 성악가에 맞춰 반주를 하려면 꼼꼼히 연습을 해야 하기에 음표, 마디마디 메모를 해 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때에는 연필로 조심조심 표시를 하지요.
 
▲ 3악보 하우스 콘서트 준비를 위한 악보에는 연필을 이용해 손글씨를 씁니다
ⓒ 이효연
브레이크 타임에는 레시피를 정리하거나 장 봐야 할 목록을 체크하기도 하는데요. 무엇보다 레시피를 적을 때에는 공을 들여 숫자 하나 글자 하나 틀리지 않도록 신경을 씁니다. T(테이블스푼) 자를 t(티스푼) 자로 잘 못 적는다든지 하는 실수를 하면 요리가 엉망이 되기 때문이지요. 나름대로 신경을 쓴 필체입니다.
 
▲ 4레시피 정확한 수치가 중요한 레시피는 글씨를 또박또박 씁니다.
ⓒ 이효연
그래도 재료가 끓고 있거나, 액체 재료를 계량할 때면 급해서 글씨가 날아가듯 쓰입니다. 저만 알아보면 되니까 큰 상관은 없습니다. 손글씨로 일단 적고 나서 수정 과정을 거친 후 다시 노트북 엑셀 표에 잘 저장해둡니다. 저에겐 정말 소중한 자료입니다.
장을 봐야 할 목록은 정말 급하게 아무렇게나 휘갈겨 써도 된다고 생각했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어서 적당히 휘갈겨 씁니다. 기껏 마트에 갔는데 '저 글자가 뭔가'하고 고민하다가 도로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낭패를 면하기 위해 재주껏 저 스스로는 알아볼 정도로만 날림으로 쓰고 있습니다.
 
▲ 5장보기 장을 볼 때에도 손글씨로 적어둔 메모를 사용합니다.
ⓒ 이효연
가끔은 관공서나 은행 업무를 보러 갈 때도 있는데 이때에도 역시 손글씨를 써야 할 일이 생깁니다. 서명하거나 자필로 개인 정보를 적어 넣거나 할 때 필요하지요.  80년대 후반 무렵에 대학을 다닐  때까지는 시험 볼 때마다 시험지에 학번을 적어 넣곤 했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저에게 있어서 손글씨로 나의 정보가 담긴 숫자를 나열해 적는 것은 아마 그때가 마지막이었던 같습니다.
 
▲ 6관공서 공적인 서류 작성는아직도 손글씨를 사용해 작성한 후 팩스 송달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이효연
네다섯 시 무렵이 되면 배달 주문도 많아집니다. '문 앞에 두어라, 개 짖으니 벨 누르지 말아라' 등등 고객들의 요청이 줄을 잇습니다. 깜빡하고 잊고 표시를 안 해두면 라이더분도 놓치기 쉽고 그 이후 후폭풍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미리미리 표시를 잘해두어야 합니다. 이때에는 붉은 펜이 필수!
 
▲ 6배달 배달 주문 전표에 고객 요청 사항을 확인 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니다.
ⓒ 이효연
분기에 한 번씩은 가게에 걸린 배너도 갈아주고 현수막도 제작해서 바꾸어 줍니다. 이때에도 시안을 그릴 때 손글씨가 필요합니다. 손으로 적은 후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디자인해서 광고사에 넘기지요. 디자인이 전공이 아니라서 때로는 그냥 그림과 손글씨로 보여드리고 말로 설명을 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하는 적도 많아요.
 
▲ 인테리어 시안 배너나 현수막 디자인을 할 때에도 손글씨와 그림으로 먼저 아우트라인을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 이효연
손글씨의 힘

그리고... 손글씨라 하니 손 편지가 생각나서 써 봤습니다. 식당을 개업하고 나서 오히려 식구들 식사는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서 한동안 미안했는데 말이죠. 먹는 장사하면서 가족들 먹거리에 소홀해지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가족에게 손 편지를 쓰자니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듭니다. 사업하느라 회사 일도 바쁜데 시간을 내서 가게에 와서 도와주는 남편, 집 안 냉장고가 텅텅 비어도 싫은 내색 없이 '걱정 말라'라며 오히려 엄마를 위로해 주는 아이, 그리고 건강하고  예전보다 덜 짖고 말썽 안 부리는 우리 강아지 두 마리.

늦게 들어가서 얼굴도 못 보고, 이야기도 많이 못 나누어서 요즘 어찌 지내는지 많이 궁금한데 이 손 편지로라도 가족에게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물가는 한없이 오르고 경기는 더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요즘 같은 어려운 때, 가장 힘이 되어주는 존재는 역시 가족이더군요.
 
▲ 9가족편지 가족의 응원과 사랑은 그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 이효연
이 글씨가 나의 진짜 손글씨 필체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고맙고 고맙고 또 고마워.
잘 해내서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자. 고마워요."

손글씨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은 정말 그 손글씨의 힘을 믿고 싶어집니다.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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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한 때는 방송에 홀릭했던 공중파 아나운서. 지금은 평생 꿈꾸었던 피아노가 있는 와인 바 주인이 되어 작은 실내악 콘서트, 와인 클래스, 소셜 다이닝 등 일 만드는 재미로 살고 있어요. 직접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고르고 피아노와 베이스 듀오 연주를 하며 고객과 공감과 소통의 시간을 가질 때의 행복이 정말 큽니다. https://brunch.co.kr/@wine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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