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독립50대] 60을 바라보는 삶, 다시 뜨거워도 될까요
[장순심 기자]
책에 대한 환상이 있다. 책을 사랑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월에 종이가 삭는 듯한 쿰쿰한 책 냄새가 좋고 사방이 책으로 둘러 쌓인 공간이 좋다. 책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멋져 보이고 책으로 나누는 대화가 즐겁다. 많은 종류의 책 중에서도 주로 소설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 읽다 보면 소설 속 인물의 삶에 빠져 든다. 그들의 희로애락이 바로 나의 이야기로 스며든다.
신기한 건 몇 달이 지나면 책의 제목도 내용도 가물가물하다. 이건 아마도 나이 탓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읽는 순간만큼은 깊이 몰입한다. 감동에 푹 젖는다. 가공된 이야기가 분명한데 현실 속 인물들이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인상을 받고 그들의 삶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책표지(리커버) |
ⓒ 클레이하우스 |
황보름 작가의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이 소설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해요. 책, 동네 서점, 책에서 읽은 좋은 문구, 생각, 성찰, 배려와 친절, 거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끼리의 우정과 느슨한 연대, 성장, 진솔하고 깊이 있는 대화, 그리고 좋은 사람들." 작가가 머리글에서 소개한 내용처럼 책은 마지막까지 푸근하고 따뜻하다.
서점 사장님 영주의 책사랑을 보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라 생각했다. 고등학생 아이를 둔 희주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고 20대 민준의 단추론이, 취업을 향한 그 지난한 과정이 내 아이들의 고민으로 연결되었다. 고교생 민철이 '사는 게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서도 튀어나오는 얘기였다.
각자의 고민을 안고 서점으로 모여드는 이들이지만 마무리는 훈훈하다. 영주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찾았고 민준은 더는 단추를 만드는 데 시간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민철은 대학 진학은 포기했지만 적어도 사는 게 싫다거나 재미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고,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
책을 읽으며 좋았던 부분은 따뜻함이 아니었다. 인물 각자가 살아가는 동안에 느끼는 치열한 삶과 벼랑에 몰린 듯한 극한의 느낌.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모두를 거는 과감한 결단이 인상 깊었다. 누구나 느끼게 되는 저마다의 한계와 그래서 더 내리기 어려웠을 삶의 방향 전환이 부러웠다. 현재 진행형의 삶을 멈출 수 있는 용기와 끝까지 자신을 놓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선택도 놀라웠다.
고삐에 매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겠다는 인물들의 투쟁을 잔잔하게 그리는 작가의 역량도 신선했다. 삶의 소용돌이가 느껴질 것 같은 순간에서 그들은 폭풍의 중심을 향했고 무(無)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워버려도 좋을 만큼의 과감하게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 같았다.
흔히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가고 싶냐'는 질문을 장난처럼 받는다. 과거를 떠올리며 좋았던 시간보다는 아쉬웠던 시간으로 돌아가서 막연히 방향의 전환을 꿈꾼다. 막상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현실의 아쉬움은 쓸데없는 상황을 가정하게 한다.
내가 지나온 시절들
책을 읽으며 나의 20대, 30대, 40대를 떠올렸다. 삶의 압박을 받을 때, 무기력의 순간에서 했던 고민들이 생각났다. 막연한 욕망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잠시의 멈춤도 허락하지 못한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나의 삶도 흘러가고 있다.
책 속의 인물들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봤으며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고요하고 치열하게 자신과 싸우며 새 삶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런 삶의 방식이 중장년인 나의 마음을 잠시 들뜨게 했다. 생의 모든 감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과 그러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는 듯했다.
작가의 짧은 강의를 들었다.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지만, 자세를 바로 하고 집중했던 것 같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열정적으로 썼던 책동네 기사 얘기부터 사는이야기를 쓰는 것까지. 그리고 이어지는 출판 과정과 글 쓰는 마음가짐까지.
나는 그때 99도에 도달해 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99도에서 100도가 되는 데 필요한 건 노력이 아니라 운이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내게 운이 없다면 내내 99도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하겠지.(p.123)
임계점, 뜨겁게 끓어오르기 위한 1도, 그것을 민준은 '운'이라고 했다. 나 또한 99도는 이미 충분히 100도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임계점이란 변화를 위한 시간이자 어떤 변화와 성취에 필수로 요구되는 시간의 문제는 아닐까.
민준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는 한편으로 마음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은 사람을 약해지게 만드니까. 나의 지난 시간과 현재를 떠올렸다. 비록 운에 기댈망정 다시 1도의 운을 위한 99도의 노력이 가능할까.
나를 설득할 시간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내기는 주저하게 된다. 지금의 내가 송두리째 엉성해질까 봐. 때문에 안정되고 초연한 삶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
그렇지만 다운시프트(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일)는 내 방향이 아닌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 모두 뜨거워도 되는 나이 같지만, 뜨거우면 안 될 나이가 따로 있을까. 그들의 고민이 내 마음을 이렇게 긴장시키는데.
답답증을 앓고 있지만 원인을 모르는 영주와 민철. 어린 영주가 답답증을 풀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에 전념했다면, 민철은 답답증을 풀기 위해 멈춰 섰다. 닮음꼴이지만 삶에 대처하는 방식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삶의 문제도 시간의 문제일지 모른다. 멈추는 때, 자신의 마음을 조정하는 때, 비상하는 때가 각각 따로 있을지도.
'민준에게 현재에서 미래까지의 거리란 드리퍼에 몇 번 물을 붓는 정도의 시간일 뿐이'지만 그 시간은 오롯이 민준이 통제 가능한 시간이다. 나의 현재에서 미래까지의 거리는 무엇으로 측정될 수 있을까?
이제 나를 설득할 시간이다. 시간에 맡겨 보자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일상을 뜨겁게 살아 보자고, 언젠가 나의 때가 허락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믿음이 나를 쓰게 할 것이니 우선은 이만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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