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의 이겼다는 거짓

2022. 10. 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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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 (55)
북벌 2
제갈량은 왜 마속을 성급하게 기용했을까. 제갈량이 마량, 마속 형제를 좋아하고 의지한 이유는 그들이 동향인 형주 출신이어서가 아니다. 두 형제는 북벌의 의의와 제갈량의 초조함을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촉의 유일한 예비 자원인 이민족 통치에도 필요했다. 제갈량은 북벌을 위해서는 관중 땅 근처에 기거하는 강족의 지원이 절대적이라고 판단했다. 장기적으로 강족을 촉나라 편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강족을 다스릴 유능한 총독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가 마속이라고 생각했고, 미래를 위해서는 하루빨리 통치의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속의 성급한 기용보다 더 심각한 실수는 따로 있었다. 제갈량은 1차 북벌 때 결정적인 2가지 우를 범했다.

첫째는 위나라와 장합의 신속한 대응을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으로 선봉장 마속과 부선봉장 왕평의 지휘권 문제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

왕평은 촉 출신으로 글자도 알지 못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존재하던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글은 몰랐지만 군인으로서는 유능했다. 젊은 시절부터 수도에 파견 가서 군관으로 근무했을 정도로 군대 경험이 풍부했다. 마속의 실전 능력 부재를 걱정한 제갈량은 야전형 장군인 왕평을 마속의 곁에 붙여줬다.

하지만 유사시에 발생할 지휘권 문제를 사전에 조율해놓지 않았다. 평시에는 마속이 전권을 행사하더라도, 급박한 상황이 되면 왕평이 군 전체를 지휘하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제갈량은 이 과정을 생략했다.

기산 전투에서 마속은 허무하게 패하고 말았다. 물도 물이지만 부하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같이 고립됐던 왕평의 부대는 굳건하게 위치를 사수했다. 위군이 감히 덤벼들지 못했다. 왕평은 부대를 보전한 채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마속은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돌아왔다.

장합은 즉시 강족 지역을 돌아다니며 ‘민심 확보’에 나섰다. 촉에 동조했던 강족 반란 지도자들은 무참하게 숙청됐다. 최초의 북벌, 최고의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강족은 더 이상 촉나라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후로 강족은 다시는 이때처럼 촉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제갈량은 스스로 직위를 낮춰 사죄했다. 마속은 억울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데 동의했다. 제갈량이 애지중지 키워오던 젊은 인재는 북벌의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졌다. 마속이 패배해서 잃은 병사가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속이 날려버린 기회가 너무나 컸다.

▶읍참마속 후 얻은 새로운 인재 ‘강유’

제갈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인재를 잃었지만 대신 새로운 인재를 얻었다. 강유다.

강유는 천수군 출신이다. 한족인지 강족인지는 애매하다. 다만 그의 집안은 강족 지역에서 자란 토착 집안이었다. 강유의 부친은 위나라에 충성하던 인물로 강족에 살해당했다. 유공자 자녀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위나라는 강유에게 천수군의 군관 자리를 하사했다. 그러나 촉군이 침공하고 강족이 봉기하자, 강유와 함께 다른 지역으로 나온 천수군 태수는 강유와 다른 관리들을 버리고 도주했다. 주인을 잃은 강유는 천수군으로 돌아왔다. 반란을 일으킨 천수군 토호들은 위나라 앞잡이라고 생각했던 강유를 받아주지 않았다. 갈 곳이 없어진 강유는 촉군에 투항했다.

제갈량은 강유의 재능을 알아봤다. 마속과 비교하면 문치의 재능은 떨어져 보일 수도 있지만, 마속에게는 없는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강유는 진정으로 대담하고 재기발랄한 지휘관이자 전술가였다.

지휘관이나 경영자 중에는 의외로 보수적이고 모험을 싫어하는 스타일이 많다. 이들은 언제나 검증된 길로만 다니려고 한다. 이들에 비해 강유는 대담하고 창의적이었으며, 발랄하고 모험적인 전투의 가치를 알았다. 이민족인 강족을 다스릴 능력도 어찌 보면 마속보다도 훌륭했다. 그가 강족의 땅에서 성장한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제갈량은 강유가 투항하자마자 중호부대라는 정예부대를 맡겨 대규모 부대를 운영하는 경험을 쌓게 했다. 마속을 성급하게 등용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1차 북벌에는 실패했지만 제갈량은 1년이 지나지 않아 관직을 회복했다. 북벌의 추진력도 상실하지 않았다. 다만 상황이 이전보다는 더욱 어려워졌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방어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사천, 한중 분지의 산곡에서 촉의 북벌, 위의 침공이 번갈아 이뤄졌다.

전쟁의 양상도 뻔하게 흘러갔다. 촉은 관중으로 들어오려고 길목을 바꿔가며 공략했지만, 위나라가 관중 분지 입구에 설치한 군현, 진창·장성·오장원 같은 지역을 좀체 돌파하지 못했다. 입구까지 간신히 왔다가 돌아가는 형국이었다. 촉의 약점은 사천 분지의 험한 산길과 군량 수송의 어려움이었다. 관중 입구에 도달해도 10일, 3주 이상 전투가 힘들었다. 위군이 대비하고 있는 요새를 돌파할 수가 없었다.

위나라는 인재와 자원이 많았다. 관중의 입구를 틀어막을 정도의 수비 병력과 인재는 널렸다. 명장 장합이 건재했고, 소설에서는 조금 평가절하됐지만, 곽회 같은 장수는 거의 평생을 이 지역에서 복무하며 수많은 공을 세웠다. 반면에 촉은 군량이고 병력이고 한쪽을 집중 공격할 정도의 역량밖에 없었다. 그러니 양동, 기만 등 별별 전략을 다 써도 통하지가 않았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촉군이 관중 입구 기산이나 오장원으로 도달할 때쯤이면 위군은 준비가 돼 있었다. 곽회는 촉군의 여러 번의 기만 작전을 능숙하게 간파해냈다.

사실 위나라는 위나라대로 고충이 있었다. 방어전이라고 해서 수비만 할 수는 없다. 강족은 언제 다시 봉기할지 모른다. 관중을 넘어 촉나라로 침공해 들어가면 전장의 우위가 단박에 바뀌었다. 가끔씩 촉군이 철수할 때 추격해 들어가보기도 했는데, 번번이 촉군의 매복과 역습에 걸렸다.

위연, 왕평 등 촉의 맹장들은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장합이 촉나라 땅으로 추격해 들어왔을 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를 못한 장합이 전사했다. 위의 명장 중 명장이던 장합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삼국시대에 위나라 최고위급 장수로 전선에서 전사한 사람이 하후연과 장합인데, 두 장수 모두 촉과의 전쟁에서 생명을 잃었다. 또 다른 명장 곽회도 침공전에서 패배했고,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여러 번 크고 작은 패전이 있었다.

관중으로 돌입해 들어오려는 촉과 이를 저지하고 촉의 공격 능력을 분쇄하려는 위의 공방전은 이렇게 일진일퇴의 싸움으로 지쳐갔다. 이 긴박감 넘치는 공방전을 견디지 못하고 제갈량이 쓰러졌다. 234년 마지막 북벌 중, 진창형(현재의 바오지시)을 공략하던 때였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의 북벌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소설에서는 이미 죽은 제갈량이 추격해 오는 사마의를 사전에 안배한 계략으로 격퇴해서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격퇴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전해주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78호 (2022.10.05~2022.10.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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