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지지율 [이현상의 시시각각]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해 공무원 사건과 관련해 서면 조사를 거부하자 감사원이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도 응했다"며 논박했다. 사실 자체야 맞지만 디테일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조사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너무 달라 그때와 지금을 평면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노·김 두 전 대통령이 조사에 응한 것은 한마디로 '세 불리'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감사원은 율곡사업(군 전력 증강 사업) 조사에 착수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 질의서를 보낸 것은 감사 마무리 단계 때였다. 국방부 장관 두 명과 해·공군 참모총장 등 전 정부의 군 관계자들이 이미 구속된 뒤였다. 노 전 대통령이 거부하기 힘든 국면이었다. 김 전 대통령 조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느닷없이 닥친 환란 고통에 국민 분노가 치솟던 때였다. 피하기 힘든 잔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오히려 답변서를 해명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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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지지율로 국정 운영에 발목
핵심 지지층 결집으로 돌파 시도
그럴수록 중도층 떠나는 딜레마
」
전직 대통령 조사를 가능케 했던 힘은 여론과 새 정부의 높은 지지율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조사할 당시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은 83%였고, 김 전 대통령 조사 시점의 김대중 정부 지지율은 71%였다(한국갤럽 자료). 문 전 대통령이 "무례한 짓"이라는 말로 반발한 데에는 여론과 지지율에서 밀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여론과 지지율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팩트의 힘에라도 기대야 한다. 그러나 서해 공무원 사건에서 정치적 논란을 압도할 결정적인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긴 힘들다. 두 전임 국정원장(서훈·박지원) 등 관련자 조사도 미진한 상태다. 정의의 시작점은 뜨거운 가슴이지만, 그 완성점은 차가운 머리다. 이 사건은 전임 정부의 도덕성을 뒤흔들 수 있는 폭발성 가득한 사안이다. 진상 규명이 필요하지만 여론과 지지율 혹은 명확한 팩트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찔러나 본다'는 시도로는 야당의 '결사옹위' 벽을 뚫기 힘들다.
MBC의 '비속어 논란' 보도를 낮은 국정 지지율과 연관 짓는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MBC 박성제 사장의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의 이사진 임기는 2024년 8월까지다. 이사진 9명 중 6명이 야권 인사다. 이들의 보호막이 될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여당의 사퇴 압력에도 요지부동이다.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다면 새 MBC 사장도 야권 성향 인사가 뽑힐 가능성이 크다. MBC 내부에서는 벌써 박성제 사장의 연임설이 돌고 있다고 한다. 인기 없는 정부가 자신들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MBC 주류의 자신감이 읽힌다.
여권은 '닥공'(닥치고 공격) 모드다. 대통령은 비속어 사과 대신 보도를 힐난하고 나섰다. 지지율 바닥을 핵심 지지층 결집으로 돌파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찮다. 약간 오르는 듯하던 지지율은 오히려 다시 떨어졌다. 품격 논란에 전통적 보수마저 고개를 돌리는 양상이다. 특히 중도층 이반이 눈에 띈다. 9월 말 실시된 한국갤럽과 리얼미터 조사 모두 중도층의 국정 수행 긍정률이 전체 긍정률을 밑돌았다. '닥공'은 축구를 재미있게 만들지는 몰라도 정치는 저열하게 만든다. 정치 환멸을 부르는 진흙탕 싸움은 여야 모두의 책임이지만, 부담은 국정 담당 세력에 더 갈 수밖에 없다.
미국의 행정학 전문가 폴 C 라이트는 『대통령학』이란 책에서 대통령의 세 가지 자원으로 '당선 득표율' '여당 의석수' '지지율'을 들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셋 중 어느 것 하나 넉넉하지 않다. 득표율은 취임 순간 이미 결정됐지만, 여당 의석수는 대통령 임기 중 한 번은 바뀐다. 지지율은 늘 관리해야 하는 유동적 자원이다. 그 자체가 국정 동력이기도 하지만, 대통령 임기 중 치르는 총선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내후년 총선에서 여소야대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윤석열 정부가 심각한 기능 부전에 빠지게 된다는 점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지지율이 힘이다.
이현상 중잉일보 칼럼니스트<lee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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