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전쟁] 1993년 북한이 찾았다는 단군릉, 왜 평양서 나왔을까
북한과 중국의 고대사 갈등
반면 중국은 고구려와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지우려고 하면서도 고조선은 다시 인정하려는 분위기다. 종잡을 수 없는 두 나라의 고조선에 대한 엇갈린 반응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1990년대 개혁개방으로 바뀐 동아시아의 정치 지형도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5000년 된 단군의 인굴 주장
1993년 10월 2일. 일련의 북한 학자들은 김일성 주석궁에 속속 모였다. 아마 이날 행사는 북한 학자들에게 절대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힘들게 연구해 온 고조선의 요동 중심설을 부인하고, 대신 평양 중심설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아비판 자리였다.
북한 학자들은 그전까지 고조선 연구로 기개가 높았다. 하지만 이날 북한 학자들은 얼굴을 숙인 채 손에 쥔 원고를 읽었다.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은 누가 봐도 고구려 시대의 무덤과 유물이었다. 그런데 북한은 그 안에 있던 인골이 5000년 전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했다. 이미 묻혀 있던 단군의 인골을 3500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고구려인이 고구려 무덤에 넣었다는 주장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사실 평양 일대에는 고려시대 이래 단군이나 기자의 무덤으로 불리는 곳이 곳곳에 있었고, 이 무덤도 고구려 무덤이 후대에 단군묘라고 이름이 바뀐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봐도 단군릉 발굴은 단순한 해프닝 같았지만, 지금도 북한은 단군릉과 고조선 평양설을 굳게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고조선 전쟁에서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루는 시점이었다.
소련의 붕괴와 주체사상 강화
북한은 단군릉에 그치지 않았다. 평양 일대의 고인돌과 성터를 대대적으로 발굴했다. 그리고 평양 일대에서 단군에 대한 민간 전설을 단군의 역사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부자세습과 주체사상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단군의 이미지로 채색하려는 목적에서다. 북한이 세계 제일의 주체국가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하여 평양을 고대문명의 발상지라고 홍보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한 발 더 나가 대동강 유역이 세계 문명의 중심지이며, 세계 제5대 문명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허황한 궤변일 뿐이다. 하지만 북한의 주장은 곧 정설이 되어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북한은 왜 이렇게 실소가 나올 법한 대동강문명론을 들고 나왔을까. 그 배경에는 1990년대 이후 국제적 고립이 심각해진 북한의 정치적 상황이 놓여 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한은 믿었던 우방이 없어졌고, 김일성 또한 고령에 따른 건강 문제로 국가 전반의 동요가 우려되는 시점이었다. 이에 북한은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마치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 세습체제를 합리화하고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주체사상을 더욱 강화했다.
이렇게 북한만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단군릉이 등장했다. 김일성도 사망 반년 전에 단군릉을 직접 방문했다. 그의 뒤를 이은 김정일은 단군릉 발굴 정확히 1년 뒤에 거대한 단군릉을 새로 축조하고 개천절 행사에도 참석했다.
“대동강은 세계 5대 문명의 하나”
당시 북한은 먹을 것도 부족한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북한의 의도는 명확했다. 단군릉 정비를 통해 단군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김씨 세습체제로 이어지는 계보를 확립하려고 했다. 사회주의권에서 처음 시도하는 부자세습 과정에서 단군과 역사를 통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북한이 단군과 평양에 집착한 이유는 중국 때문만이 아니었다. 남한과의 비교 문제도 있었다. 서울·경주·공주 등 고구려를 제외하면 한국의 고대국가 수도는 대부분 남한 쪽에 있었다. 평양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최근까지도 일종의 변방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북한이 남한에 필적하는 정통성을 갖추려면 평양 일대를 거점으로 하는 자신만의 역사가 필요했다. 고조선, 나아가 대동강문명론을 발전시킨 가장 큰 이유다.
북한은 고조선이 기원전 4000년기, 즉 세계 4대문명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또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평양 인근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들며 100만년 전부터 살던 사람이 지금 북한 주민의 조상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100만 년 전의 고인류가 현재 북한 사람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인류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상식과도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단군릉이 발굴된 지 30년이 된 지금도 북한은 대동강문명론을 통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올해에도 개천절을 맞이하여 평양 남쪽의 낙랑구역에서 대대적으로 낙랑박물관 개관식을 열었다. 3대가 세습한 북한에서 고대사를 이용한 체제 강화는 북한의 핵심 정책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자조선·한사군 내세운 중국의 속셈
북한이 단군릉 발굴을 주체사상 강화 도구로 이용하는 동안 중국은 만주에서 한반도 역사를 조직적으로 지우고 있다. 지난 9월 중국국가박물관이 한·중·일이 공동 개최한 청동기 특별전에서 고구려와 발해 연표를 삭제해서 한·중 외교 논란까지 일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고구려·발해 삭제만큼이나 중요한 논점이 간과됐다. 바로 고조선이다. 중국 측은 이번 전시회에서 고조선을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시작인 기원전 15세기부터 시작한다는 연표를 만들었다.
얼핏 모순돼 보이지만 그 안엔 숨은 의도가 있다. 바로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조선 관련 문제다. 기원전 12세기경 상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가 되는 혼란기에 상나라 유민인 기자가 고조선의 정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한나라 때에 처음 등장해서 소중화(小中華)를 내세우던 조선시대에도 널리 유포됐다.
중국이 기자조선을 내세우는 목적이 있다.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이 열었다는 논리와 이어진다. 중국의 의도는 이번 청동기 전시회의 남한 삼국시대 패널에서도 잘 드러났다. 중국 패널에는 남한 삼국시대가 낙랑군을 비롯하여 실체가 애매한 현토·임둔·진번 등 한사군의 영향으로 성립됐다고 서술했다. 남북한의 역사가 모두 중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고대사는 왜 현실정치에 이용되나
지난 60여년 간 중국과 북한의 고조선에 대한 관심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급변했다. 북한은 1990년대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는 와중에 단군릉을 택했고, 중국은 국력 팽창과 함께 동북공정을 시도했다. 엄정한 사실에 근거한 논증과 국제 학계의 검증이 없이 정치적인 논리에 따른 주장만 앞설 경우 오히려 웃음거리만 될 뿐이다.
고대사는 과학의 발달로 새롭게 규명되고 있다. 지난 3일 발표된 2022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은 고고학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에서 채취한 DNA로 인류의 기원과 계통을 밝힌 스웨덴 출신 진화생물학자 스반테 페보에게 돌아갔다. 그가 개발한 고DNA 분석방법으로 수십 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에서부터 최근 인류에 이르는 유전적 계통을 밝히는 성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순수한 단일민족 신화가 무너지고, 인류는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며 형성돼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같은 연구 결과를 무시한 채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자국의 영광을 내세우며 고대사를 재단한다면 그들의 처지만 비루하게 할 뿐이다.
단군과 고조선은 북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소중한 역사다. 과거 한국사에 위기가 올 때 고조선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북한과 같은 일방적인 주장과 정치적인 선전이 계속된다면 고조선과 단군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30년간 북한의 지속적인 홍보에도 북한의 단군릉을 진지하게 다루는 외국의 학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항할 때도 치밀한 논리가 필수다. 한국사의 위대함을 감성적으로 강조한다면 국제적인 인정과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북한의 단군릉 발굴이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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