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K팝 팬덤의 진화가 팬덤 정치에 주는 교훈

2022. 10. 7.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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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의 명암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전 세계에 K팝을 대중화하고 퍼뜨리는 데에 K팝 팬덤이 극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이 섹션에서는 그 팬덤 또한 탐구합니다.”

세계적인 공예·디자인 박물관인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 뮤지엄이 9월 말 시작한 ‘한류! 더 코리안 웨이브’ 전시에서 K팝을 다루는 제3섹션을 소개하는 글이다. 그 소개에 걸맞게 이 섹션은 벽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응원봉들로 시작한다. 패션지 보그 영국판은 전시 리뷰에서 “K팝 팬들에게 있어서 각 아이돌 그룹과 연관된 색깔로 빛을 내는 응원봉(lightstick)은 라이브 콘서트 중에 그룹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 K팝 팬덤의 장점, 위로·동반성장
맹목적 경쟁심의 ‘정치질’은 단점
충돌 줄며 ‘성찰적 팬덤’으로 진화
팬덤 정치도 성숙해지려 노력해야

각양각색의 응원봉은 영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중에 아이돌 ‘덕질’(마니아를 뜻하는 ‘오타쿠’의 한국식 변형 ‘덕후’와 ‘질’의 합성어. 무언가에 심취해 열성적으로 파고드는 행위)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신기한 광경이다. 저렇게 각 그룹의 팬덤별로 차별화된 디자인의 응원봉이 있다니! 마치 각 그룹과 그 팬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은 공동체의 엠블럼 같지 않은가.

실제로 대표적인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그 팬덤 아미(ARMY)와 분리되지 않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런 면에서 응원봉으로 시작하는 V&A ‘한류!’ 전시의 K팝 섹션은 예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는 영국의 주요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라프, 가디언 등의 리뷰에서 별 4~5개(5개 만점)에 이르는 호평을 받으며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신도보다 부모 같은 아이돌 팬덤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V&A)에서 진행 중인 ‘한류! 더 코리안 웨이브’ 전시에 나온 형형색색의 아이돌 응원봉. 각 아이돌 그룹의 정체성을 시각화한 것으로 라이브 콘서트에서 그룹과 팬들의 상호작용 도구다. [로이터=연합뉴스]

국내 평론가들 역시 K팝이 기존 대중음악과 차별화되는 결정적인 요소가 팬덤이라고 분석한다. 코리아 중앙데일리가 진행한 음악평론가 인터뷰 시리즈에서 ‘김작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K팝 팬들은 처음에는 음악 때문에 어느 그룹에 입문하더라도 나중에는 음악보다 그 그룹의 캐릭터, “더 정확하게는 한 그룹 내에서도 어떤 멤버 개인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멤버와 그룹에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헌신을 보인다.

때때로 그 헌신은 종교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하철 역의 거대 전광판들에 다양한 아이돌 멤버의 얼굴이 떠있고 얼굴 밑에 “OO야 태어나줘서 고마워” 등의 문구가 있는 걸 보면 (이들은 팬들의 ‘조공’으로 만들어진 생일 축하 광고다) 마치 판테온(만신전)에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이다.

또 하나의 한국 특유의 팬덤 문화중에 생일 카페가 있는데, 아이돌 멤버의 생일에 팬들끼리 카페를 빌려 ‘아이돌 없는 아이돌 생일 파티’를 즐기는 것이다. 팬들은 카페를 아이돌 테마로 장식하고 아이돌 얼굴 사진을 넣어 만든 부채나 카드 등의 굿즈를 교환한다. 이건 마치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일에 신도들끼리 축제를 즐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하지만 신의 뜻에 순종하며 신에게 소원을 비는 신도들과 달리, K팝 팬들은 아이돌이 자신의 이상에 맞게 행동하고 승승장구하기를 기원하며, 직접 지원하고 간섭한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말한다. “한국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대하는 방식은 부모가 자녀를 부모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것과 닮았다. 팬들은 돈을 지불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앨범을 사고 시간을 들여 음원 스트리밍을 해서 그 스타의 음원을 음악 차트 상위에 올린다. 스타에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에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일종의 패배감까지 느낀다.”

여기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는 평론가의 말대로 팬들이 “음악을 음악으로 즐기지 않고 1등을 해야만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팬들의 진지한 비평이 없으면 장기적으로 K팝의 음악적 퀄리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K팝 팬덤의 장점도 있다. 아이돌 그룹과 팬이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며 동반성장하는 것 (대표적인 예가 옆집 소년들 같던 존재에서 월드 스타로 성장한 BTS와 초국가적 네트워크가 된 아미), 아이돌의 이미지를 위해 팬덤의 이름으로 기부·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사회적 의식에 눈뜨는 것, 굿즈 등의 2차 창작을 하면서 창의력을 키우는 것 등이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음악보다 아이돌 멤버에 대한 애정에 집중해서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 문제, 그리고 내 아이돌을 지켜야 한다는 맹목적인 지지와 내 아이돌이 1등이어야 한다는 경쟁심에서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이른바 ‘정치질’을 해서 타 팬덤이나 팬덤 바깥의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문제 등이 K팝 팬덤의 어두운 면이다.

K팝 팬덤을 가장 일찍 본격적으로 다룬 책 중 하나인 『팬덤이거나 빠순이거나』(2013)에서 저자인 음악평론가 이민희는 팬들이 “나의 아이돌을 우습게 여기는 수많은 적들과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는 전투적 심리를 갖고 있다고 했다.

‘팬질이 곧 정치질’ → ‘정치질이 곧 팬질’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에서 오세연 감독이 정준영 사건을 최초 보도한 기자를 만나 사과하는 장면. [사진 오드]

“때때로 나의 가수가 위기에 몰리면 팬페이지나 팬카페의 마스터는 대중의 오해를 덮을 만한 내용을 정리해 다른 사이트에 퍼가라는 행동요령을 전하기도 한다. 반대로 경쟁 가수에 대한 불리한 정보를 확산할 수도 있다. (…) 팬덤은 나의 가수를 사랑하는 한편 남들의 가수를 미워해본 경험이 있기에 정치를 안다. 여론을 혹은 세상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안다. 분란을 예측하고 만드는 방법을 안다. 그래서 ‘팬질은 곧 정치질’이라는 평판도 따른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팬덤정치의 추종자들이 뉴스 댓글판, 인터넷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벌이는 일 아닌가? 흥미롭게도 저 책이 나오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K팝 팬들의 과격한 ‘정치질’은 순화된 반면, 진짜 정치판의 ‘정치질’은 과격한 ‘팬질’이 됐다.

평론가 김작가에 따르면 1세대 K팝 팬들이 매우 ‘폭력적’이었던 반면에 “이제는 이런 과격한 행태는 거의 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이미지를 위해서 팬인 자신도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돌 팬덤의 전투적 성향과 ‘정치질’이 감소한 또 하나의 이유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출현한 한편, 평론가 정민재의 말대로 “대중의 취향이 극도로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느 아이돌이 어느 아이돌의 라이벌 혹은 ‘주적’이라 하기가 어렵고, 한 아이돌의 팬덤이 전반적인 대중의 취향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춘추전국시대다. 그래서 1세대 아이돌 H.O.T.와 젝스키스 팬덤 사이에 있었던 무시무시한 격돌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아이돌 팬덤을 주도하는 1020 세대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민감해서 아이돌이 문제 있는 언행을 했을 때 무조건 감싸고 돌지 않는다. 이러한 팬덤의 진화는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에서도 볼 수 있다.

가수 정준영의 열혈 팬이었던 젊은 감독 오세연을 비롯해 빅뱅의 승리 등 선망했던 스타가 범죄자로 전락한 경험을 가진 다른 ‘덕후’들은 덕질에 얽힌 좋은 추억을 잃게 된 피해자로서의 분노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사랑한 탓에’ 그의 범죄를 간접적으로 방치·조장한 게 아닌가 하는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을 함께 표현한다. 여기서 가장 빛나는 장면은 정준영 사건이 처음 보도됐을 때 믿지 않으며 기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던 감독이 해당 기자를 찾아가 사과하고 서로 위로하는 장면이다.

한편 감독은 여전히 범죄자 ‘오빠’들을 두둔하며 팬으로 남아있는 이들도 있음을 언급하며 그들의 심리를 알기 위해 태극기 집회를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는 팬들을 만난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감독이 그 외의 정치 팬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자 극단적 선택을 한 고 조민기 배우의 팬이었던 감독의 어머니가 그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지지 않고 최악의 방식으로 회피한 것에 분노를 터뜨릴 때, 비슷한 사례로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연예인 팬덤과 정치 팬덤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팬덤정치의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팬덤정치의 폐해는 K팝 팬덤의 어두운 면과도 일치한다. K팝 팬덤이 음악보다 아이돌 멤버에 대한 애정에 집중해서 음악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처럼 팬덤정치는 정책보다 정치인 개인에 대한 애정에 집중해서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을 낳고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다. 그러나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을 바탕으로 하는 팬덤정치의 확산을 막을 방법은 좀처럼 없어 보인다.

팬덤정치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K팝 팬덤의 긍정적 진화를 닮을 방법을 생각해보자. 아이돌 그룹의 양적 증가와 다변화가 팬덤 간의 폭력적인 격돌을 줄어들게 한 것처럼, 중도파 정치인들을 비롯한 여러 정치인에 대한 팬덤이 활성화되면 팬덤정치의 극단주의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에 대한 분노로 뭉친 이성적인 팬덤을 만들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또한 K팝 팬들의 반성과 성찰이 늘어난 것처럼 정치 팬들의 스스로 성숙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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