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현실 외면한 정책의 대가

정재홍 2022. 10. 7.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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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한 달 만에 레임덕 위기에 빠졌다. 그가 야심 차게 내놓은 부자 감세안은 발표 열흘 만에 철회됐다. 영국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하고 금리가 치솟는 등 금융 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부자 감세안 발표 이후 집권 보수당 지지율은 21%로 떨어져 노동당(54%)과의 격차가 3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트러스 총리는 지난 4일 복지 혜택 축소를 시사하는 발언도 해 다음 총선에서 노동당에 정권을 내줄 수 있다는 우려가 보수당 내에서 커지고 있다.

트러스 총리는 ‘제2의 대처’를 내세우며 집권했다. 1979~90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세금 인하와 공기업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 경제를 되살리려 했다. 대처 전 총리는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주면 그들이 더 많은 소비와 투자에 나서 경제가 성장한다는 낙수(trickle-down) 이론을 신봉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도 이 이론에 따른 정책을 펼쳤다.

「 영국 부자 감세안에 금융 혼란
이념 앞세운 정책, 국민에 피해
야당 협력 없는 정책은 신기루

지난 5일 영국 버밍험에서 열린 보수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리즈 트러스 총리. [EPA=연합뉴스]

그러나 낙수 이론은 현실에서 증명되지 않았다. 대처 전 총리의 감세에 따른 경제 성장 효과는 비슷한 시기 높은 세금을 유지했던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차이가 없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자 감세도 기대했던 성장을 이끌지 못하고 재정 적자만 키웠다. 오히려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부자 증세를 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기에 미국 경제는 고속 성장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는 낙수 이론을 ‘좀비 이론’이라고 부른다. 현실 적합성이 없어 사라져야 할 이론임에도 좀비처럼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트러스 총리의 위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영국이 직면한 경제 위기에 잘못된 처방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며 서민들의 삶은 힘겨워졌다. 지난 8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9.9% 뛰었다. 물가를 잡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며 주택 담보 대출 이자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서민들을 위한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해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트러스 총리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 감세안을 밀어붙였고, 부족한 재정은 국채를 발행해 메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외환시장은 어이없는 정책을 펴는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를 잃고 파운드화를 투매했다.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은 혼란을 일으키고 국민 삶을 피폐하게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정책, 탈원전, 대북 화해 정책이 대표적이다.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소득주도성장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으로 이어져 자영업자를 힘들게 하고 저임금 일자리를 없앴다. 주택 공급은 늘리지 않은 채 수요만 옥좼던 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주택 가격 폭등을 불러왔다. 성급한 탈원전은 전기 요금 인상과 원전 생태계 붕괴를 낳았다. 일방적인 대북 화해 정책은 북한의 핵 개발은 막지 못한 채 한국의 안보 입지만 좁혔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 정부의 실책 덕분에 집권했다고 할 수 있다. 실책을 바로잡고 한국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윤 정부는 실현 가능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러려면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과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윤 정부는 집권 이후 민주당을 국정 파트너로 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이 윤 대통령을 공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건 변명이 안 된다. 대통령은 국정 최고 책임자다. 야당의 반대를 포용하며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게 대통령의 임무다. 해리 트루먼(1884~1972) 전 미국 대통령이 재임 중 백악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아뒀던 문구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뜻)가 말하듯 대통령은 최종 책임자다.

비속어 파문 등으로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도는 20%대까지로 떨어졌다. 대통령이 부주의한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조기에 진화됐을 사안이 대응을 잘하지 못해 커졌다. 대통령은 이제라도 사과하고 당면한 북한 핵·미사일 위협, 경제 위기 등의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당과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윤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25%에서 22%로)나 여성가족부 폐지 등은 법 개정 사항이라 민주당 동의가 필수적이다. 민주당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이를 포기하고 시급한 국정 현안에 매달리는 게 현명하다. 복합위기 속 한국이 정쟁에 발이 묶이면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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