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선] 어느 대우조선 사외이사의 생존기

서경호 2022. 10. 7.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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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소송은 전쟁과 같았다.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투자자들, 청구를 당한 대우조선과 회계법인에는 ‘쩐의 전쟁’이지만, 나에게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최근 출간된 경제학자 신광식 박사의 『나는 대우조선의 사외이사였다』에서 인용했다. 그는 대학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을 거쳐 지금은 로펌에서 일한다. 진보와 보수 모두 인정하는 경쟁정책 전문가다.

대기업 사외이사는 아무나 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대주주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거나 검찰 등 권력기관의 고위직에 있었거나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기라성 같은 명망가들이 많다. KDI 시절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되는 데 기여했던 신 박사는 학계 선배의 추천으로 2013년 3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임기 2년의 대우조선 사외이사를 지냈다. 깐깐한 스타일 탓인지 연임되지 않았고 그게 유일한 사외이사 경험이었다.

「 13건에 총 2200억원 소송 당해
5년 재판…한국서 첫 면책 판결
“직무는 알고 사외이사 맡아라”

2015년 7월 대우조선 분식회계 사건이 터졌다. 감사원 감사, 검찰 수사, 금융당국의 회계감리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대우조선 경영진과 공인회계사들이 기소돼 처벌받았다. 언론과 정치권은 ‘대우조선을 망친 거수기 사외이사’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2016년 7월 500억원을 배상하라는 국민연금을 시작으로 기관투자자들의 소장이 날아왔다. 그는 “소장을 받을 때마다 아내는 절규했고, 언제 또 소장이 날아올지 몰라 우체부만 보면 불안에 떨었다”며 “한동안 넋을 잃고 살았다”고 절절하게 썼다. 그렇게 1년간 13건의 소송을 당했고 청구금액을 다 합하면 2200억원에 달했다. 설상가상으로 아파트마저 가압류됐고 보험사는 고지의무 위반 등을 이유로 임원배상책임보험에 따른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야말로 벼랑 끝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운 나쁜 사외이사의 패가망신기(記) 같다. 기존 판례도 그랬다. 법원은 분식회계에 대한 사외이사의 책임을 엄하게 물어왔다. 손해배상액의 최소 10%, 최대 60%까지 사외이사에게 책임을 지웠다. 관련 법률에 따르면 사외이사가 재무제표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했음에도 분식회계 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야만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사외이사가 ‘상당한 주의’를 했다고 인정해 책임을 면해준 사례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소송전이 시작됐다. 2016년부터 5년간 한 달에 두 번꼴로 서초동 법원에 출석했다. 지난해 2월 첫 판결이 나왔다. 대우조선, 대우조선의 전 경영진, 회계법인 등은 손해배상 책임이 있지만 사외이사는 면책 판결을 받았다. 사외이사가 ‘상당한 주의’를 했다는 점을 인정해 책임을 면제한 우리나라 최초의 판례였다. 나머지 소송도 마무리됐다.

어떻게 대반전이 가능했을까. 다행히 모든 이사회 발언을 녹취한 기록이 있었다. 신 박사는 2년간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을 지내면서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이사회에 올라온 67건의 안건 중 4건은 반대하고 1건은 유보했다. 외부감사인이 컨설팅 같은 비감사 용역을 맡는 데에도 반대했다. 회계법인의 독립성을 저해할 수 있어서다. 경영진(사내이사)보다 사외이사의 책임이 무거울 수는 없고, 감사의견 같은 회계법인의 전문정보를 사외이사가 믿는 건 합리적이라고 보는 미국 사례도 찾아냈다. 회계법인이 적정의견을 낸 재무제표의 부실을 경영진이나 외부감사인의 협조 없이 회사의 일상 업무에서 떨어져 있는 사외이사가 잡아내기는 힘들다. 법원이 이런 점을 인정했다.

신 박사는 대우조선 분식회계의 원인으로 대주주인 산업은행 책임론을 제기했다.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조선업 특성을 무시하고 단기 성과주의를 조장하는 경영평가를 해온 게 잘못이라고 했다. 경영자와 회계사 같은 전문가들의 윤리의식을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

사외이사에 대한 조언도 빼놓지 않았다. 자신의 직무가 뭔지는 알고 맡아야 한다. 무보수·명예직 사외이사라고 해도 이사의 의무와 책임은 남는다. 이사회 열지 않는 회사, 지배주주나 경영자의 신뢰성에 문제 있는 회사의 사외이사는 맡지 말아야 한다. 상법 등 관련 법률을 공부하고 이사회는 꼭 참석하라. 수동적인 사외이사는 되지 마라. 그는 “사외이사가 거수기 노릇을 해야 재선임 확률이 높아지고 까칠하게 하면 연임이 안 되는 게 현실”이라며 “평판이든 뭐든 사외이사 평가시스템이 시장에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발표나 기소는 대대적으로 보도되지만, 정작 재판 결과는 같은 비중으로 취급되지 않곤 한다. 대우조선 사외이사들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는 보도는 많이 나왔는데 최종 재판 결과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을 위해 남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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