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본인의 한국 향한 평생에 걸친 감사와 사죄
[이윤옥 기자]
"일본은 한국과의 오랜 교류의 역사를 학교에서 상세히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일본과 한국이 교류해온 사실을 알고 더 나아가 일본이 행한 식민지시대의 사실을 알아야 우리 일본인들이 사죄의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고려박물관은 많은 일본인에게 한국과의 역사적 사실과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재일동포를 비롯하여 한국인과의 화해의 길을 열어 좋은 관계 개선을 이루고자 활동해왔습니다." (197쪽)
일본의 고려박물관(高麗博物館) 이사장을 지냈던 하라다 쿄꼬(原田京子) 이사장(재임기간, 2013.11~2018.10)으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다. 이 책의 제목은 <나와 한국 : 감사와 사죄를 위한 여행>(일본어판)이다.
▲ <나와 한국> 책 표지 |
ⓒ 일본 코세이샤 |
"1971년 서른 살 때까지 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수업을 위해 열심히 수업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아시아 제국 특히 조선을 혹독한 식민지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강탈하고, 생명을 빼앗고, 토지는 물론 언어와 이름까지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이 너무나도 못된 짓을 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교과서에 없었지만 나는 수업시간에 이러한 사실을 열심히 학생들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때 학생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 (4쪽)
하라다 이사장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수풍댐 건설 현장에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냉난방과 수도시설이 잘 갖춰진 곳에서 숙박을 하고 있었지만 현지의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강도와 숙소 등은 식민지 지배의 최전선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조악한 형편이었음을 알고 '너무나 죄송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라다 이사장은 줄곧 해왔다.
거기다가 시아버지도 조선총독부 전기기사 출신이다. 물론 남편 역시 조선 경성(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에는 조선인 식모를 둘 만큼 풍요로웠다고 한다. 남편은 훗날, 당시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커가면서 "조선에 큰 빚을 졌다. 언젠가는 화해를 위한 일을 해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는데, 뜻하지 않게 쉰다섯 살(1997년)의 나이로 암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하라다 쿄꼬 이사장은 음성 꽃동네서 장애인들로부터 '하라다 이모'라고 불리며 자원봉사를 했다. |
ⓒ 하라다 쿄꼬 |
▲ 음성 꽃동네서 중증 장애인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있는 하라다 쿄꼬 이사장. |
ⓒ 하라다 쿄꼬 |
<나와 한국 : 감사와 사죄를 위한 여행>은 크게 3장으로 나눌 수 있다. 1장은 음성 꽃동네 시절의 일기와 일본에 보내는 각종 소식들이며 2장은 광명사랑의 집에서의 일기와 일본 지인 등에게 보낸 글로 구성되어 있다. 3장은 하라다 쿄꼬 이사장이 자원봉사를 했던 고려박물관에 관련된 일들을 소개한 '고려박물관과 나'라는 항목으로 ①고려박물관의 성립 과정, ②고려박물관의 설립목적, ③활동 모습, ④이사장이 된 내력 등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 하라다 이사장이 쓴 한글 노래말, 이것으로 장애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 하라다 쿄꼬 |
▲ 장애우들을 위해 특수 제작된 교구들을 일본에서 가져와 아동의 발달 교육에 힘썼다. |
ⓒ 하라다 쿄꼬 |
어쩌면 위 글이야말로 하라다 이사장이 한국과 한국인에 갖고 있는 알맹이 '심정'이 아닐까 한다. 하라다 이사장은 일본에서 사회과 교사를 하다가 장애아 학급을 담당했고 이후 양호학교로 옮긴다. 특히 중증 상태의 장애아들을 맡으면서 '장애아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혼자서는 밥을 먹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옷도 입을 수 없는 아이들, 초등생의 나이가 되어도 기저귀를 차고 있어야 하는 장애아들을 일본에서 보살핀 경험이 있어 꽃동네에서도 하라다 이사장은 중증 장애아들을 맡았다.
처음에 꽃동네에 왔을 때 동료 봉사자들은 "일본인이 왜 이곳에?"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한국인은 일본인을 싫어하고 있구나'라는 직감을 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니까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각오가 섰다고 했다.
하라다 이사장은 꽃동네 장애인들로부터 '하라다 이모'로 불렸다. 한국말을 미리 배워 둔 덕에 일상생활에 대한 소통은 그런대로 가능했기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하라다 이모'는 꽃동네서 인기 만점의 '보모 아줌마'였다. 특히 중증 장애아들의 교재 교구와 장남감 등을 일본에서 지원 받아 아이들에게 적용시키는 등 장애인들이 교육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편, 서로 어색하던 동료들과도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쉬는 날 하라다 이사장을 데리고 한국의 명소 구경을 시켜주었고 집에 초대해 맛있는 한국 음식도 만들어 주는 등 서로간의 우정을 나눈 이야기들을 읽노라면 하라다 이사장이 평생 꿈꾸던 '한국인들과의 화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는 것 같아 독자의 한 사람으로 기뻤다.
▲ 하라다 이사장은 음성꽃동네 봉사 이후에도 한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지를 찾는 등 활발한 한일교류를 이어갔다. 정신여고 출신의 김마리아 지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방한했을 때의 하라다 쿄꼬 이사장(오른쪽 끝에 있는 분). 2019년 6월. |
ⓒ 하라다 쿄꼬 |
▲ 고려박물관 회원들과 3.1독립운동 100주년 도쿄 전시회를 위해 사전 답사한 하라다 이사장(뒷줄 오른쪽에서 4번째). 2018년 6월 |
ⓒ 하라다 쿄꼬 |
▲ 3.1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며 동아시아 평화와 우리들(3.1立運動100年を考える 東アジアの平和と私たち) 도쿄 전시회에서 기자가 하라다 이사장에게 기념품을 전달했다, 오른쪽이 하라다 이사장, 왼쪽이 기자, 2019년 5월. |
ⓒ 이윤옥 |
[일본 고려박물관]
- 오는 길 : JR 야마노테선(山手線) 신오쿠보(新大久保)에서 내려 쇼쿠안도오리(職安通) 한국 '광장'수퍼 건너편 광장 건물 7층
- 전화 : 도쿄 03-5272-3510 (한국어 대응이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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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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