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 '국민의 뜻에 따르는 정치'는 없다

2022. 10. 6.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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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이(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제1조 제2항) “오직 국민만 믿고, 오직 국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윤석열 대통령) “우리는 국민의 뜻에 따라 일하는 대리인입니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우리 정치에서 ‘국민’이란 단어만큼 엄중성과 완결성을 담은 표현은 없다. 이에 대통령과 야당 대표뿐 아니라 웬만한 정치인들은 일상적으로 ‘국민의 뜻’을 앞세운다. 매번 흘려듣던 식상한 어투인데 한 번쯤 곱씹어 보게 된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국민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는데 왜 허구한 날 싸움박질만 하는지? 국민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고, 여야가 알아차린 국민의 뜻이 같은 것인지?

국민의 뜻의 주체가 되는 ‘국민’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내는 획일적인 집합체가 아니다.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온전한 국민의 뜻은 없다. 우리의 뜻과 그들의 뜻이 있을 뿐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이 이러저러하다고 내세울 때는 여론조사 결과를 말한다. 그렇지만 여론은 국민의 일부가 일시적으로 갖는 생각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말하는 국민의 뜻은 프랑스 철학자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곧 공동체 전체를 이롭게 하는 ‘공동선(common good)’을 의미한다. 루소는 시민 개개인의 뜻이 모여 일반의지를 형성하지만, 시민들은 일반의지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했다.

국민의 뜻이 갖는 엄중성과 도덕성이 우리 사회를 점점 더 적과 동지만 있는 세상으로 내몰고 있다.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뜻이 곧 국민의 뜻이니 이를 좇지 않는 자들은 적폐이고 사회악이다. 문제는 정치인보다 ‘국민’이 더 앞장서 상대 집단을 악마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뜻을 만드는 주체가 아니라 정치권 패거리 싸움의 행동대원이 돼 버린 것이다. 도덕화한 반(反)다원주의가 그 싸움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답해야 하는 국민이 집단사고와 획일주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국민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악마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때는 디지털 공간 속에서 우리와 그들의 뜻이 서로 치고받으면서 온전한 국민의 뜻을 만드는 공론장이 형성되길 기대했다. 공론장은 다른 생각을 가진 우리와 그들이 아무런 위협 없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온라인 커뮤니티나 인터넷 댓글을 보면 특정 정치 세력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만 가득 차 있다.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이는 ‘끼리 집단’만 난무한다. 끼리 집단에서의 소통은 증오의 정치를 위한 동력을 키운다. 차이나 다양성은 용납하지 않는 ‘대중독재’를 만들어 낸다.

많은 사람들이 적대적 정치에 대해 걱정하고 분노하지만 실제 행동이나 발언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대부분 침묵을 지키거나 철저한 ‘자기 검열’을 거친 발언을 할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강의실에서, 심지어 사적 대화의 자리에서도 자기 검열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폭압적 권력이 양심의 소리를 막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국민이 다른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정치인 개인에 대한 지지와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신념은 구분돼야 한다. 특정 정치인이 내가 지향하는 ‘시대정신’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정치인이 시대정신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말뿐인 외침일 수도 있거니와 비록 진정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 방안에서는 내 생각과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정 정치인 혹은 정치 세력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고 ‘하고 싶은 것 다 해’하면서 감시와 비판의 눈길을 거두는 것은 바람직한 국민의 태도가 아니다.

반대하는 정치 세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의 눈길을 지지하는 세력에도 함께 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더 유능하고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방식이 상대 세력에 대한 악마화가 돼서는 안 된다. 지지 세력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면서도 필요하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그 정치인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서 더 필요한 일이다.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고 했다.

윤성이(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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