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두 개의 프로파간다
‘전쟁의 첫 희생자는 진실’이라는 말이 있다.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전황. 우크라이나 전쟁도 마찬가지다. 가장 먼저 희생된 진실은 ‘전사자수’. 양국 모두 자국의 피해는 되도록 감추려 하고, 상대의 피해는 턱없이 과장한다.
러시아군은 개전 이후 이제까지 자국 병사 60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집계는 다르다. 러시아군의 전사자수가 10월에 들어와 이미 6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진실은 아마도 6000과 6만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게다.
프로파간다 없는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상의 포격전 만큼이나 치열한 것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선전. 화력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선전전의 측면에서는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압도한다. 이 우위는 어디서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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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는 왜 싸우는지 명분 없어
‘조국 전쟁’ 허황한 망상으로 세뇌
우크라이나, 지키려는 명분 뚜렷
젤렌스키의 탁월한 설득도 한몫
」
가장 큰 원인은 ‘명분’일 게다. 우크라이나의 명분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병사와 국민들에게 이 싸움을 왜 해야 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웃 나라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침략을 해왔다. 당연히 총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반면 러시아는 자국군 병사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러시아 병사들은 3일 안에 끝난다는 ‘특수군사작전’에 동원됐다고 믿었고,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고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전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명분이 없는 자리는 망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미국과 나토가 우크라이나를 앞세워 러시아를 절멸시키려 한다.’ 러시아의 프로파간다는 대부분 이 지정학적 망상의 반복적 주입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설득’이라기 보다는 ‘세뇌’에 가깝다.
‘프레임’ 전략도 사용된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나치 독일을 물리친 영광스런 ‘조국 전쟁’의 추억에 젖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아조프 연대와 같은 네오나치들의 지배하에 있으며, 이들을 물리치는 것이 곧 제2의 조국전쟁이라는 것이다. 온 국민이 이 허황한 망상 속에 산다 하더라도 ‘전장’의 병사들은 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장의 자식이 고국의 부모에게 아무리 실상을 알려도 부모마저 제 자식의 말을 믿지 않으려 한다. 세뇌란 게 이렇게 무섭다.
우크라이나 프로파간다의 또 다른 핵심은 젤렌스키라는 탁월한 연설가의 존재다. 그는 매일 저녁 연설을 통해 참호 속의 병사들을 격려하고, 방공호 속의 국민들을 위로하고, 전방의 병사와 후방의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킨다. 유엔 총회와 주요 의회의 연설을 통해 군사적 지원을 얻어낸 것도 그의 연설. 로고스·에토스·파토스를 고루 갖춘 그의 연설은 ‘푸틴의 총보다 강하다’는 평을 들으며 외국의 지원을 얻어내고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연출의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젤렌스키는 늘 카키색 군용 티셔츠를 입고 연설을 스마트폰으로 중계한다. 때로는 격무에 지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때 그는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일반 국민처럼 전쟁에 지친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푸틴의 연출이다. 그는 온갖 휘황찬란한 장비와 장치를 동원해 자신을 영웅으로, ‘현대의 짜르’로 연출하기를 좋아한다. 방송용 분장에 1000만 원이 넘는 명품 옷들을 걸치고 거의 종교적 ‘제의’ 수준의 인위적 연출을 즐긴다.
마지막 요인은 언론 정책의 차이다.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의 언론은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전장의 자국 병사를 위험에 빠뜨리는 보도는 삼간다’는 준칙만 지킬 뿐, 보도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러시아에는 독립언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은 이미 나라를 떠났다. 논조의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관영매체들은 전장에서 취재의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병사들의 안위 따위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러시아군의 활약상을 담은 프로파간디스트들의 부주의한 보도는 우크라이나군에게 반격에 필요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왔다. 그 보도들 덕에 상륙함이 침몰하고, 첨단 자주포가 파괴되고, 용병그룹의 본부가 하이마스에 공습을 당했다.
결국 국민의 뇌 속에 심어줄 망상이 실제의 전황, 현실의 병사들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그 망상이 얼마나 강력한지 키이우에서 철수를 하고, 하르키우에서 후퇴를 해도 러시아 국민들은 이를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망상의 효과가 오래 가겠는가. 이번의 리만 철수는 프로파간다로도 가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늘 승전보만 전하던 관영매체들조차 이제는 패배를 인정한다. 물론 그 책임은 푸틴이 아닌 전장의 장군들에게 돌아간다.
프로파간다가 꼭 진실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이 희생되는 전장에서조차 효과적인 것은 사실에 입각한 설득이지, 거짓에 의존한 세뇌가 아니다. 러시아의 패배는 이미 프로파간다의 실패 속에 예고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정치는 전쟁이다. 그러다 보니 프로파간다만 난무한다. 그런데 두 당의 프로파간다 모두 실패한 러시아의 것을 닮았다. 성공한 프로파간다의 요체는 논리·윤리·미학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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