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의 그림세상] 이승조, 달나라 시대 내다본 예언자

2022. 10. 6.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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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국이 50년 만에 유인 달 탐사 프로그램을 재개했지만, 그 시작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지난 8월 29일 예정됐던 아르테미스 1호의 발사가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면서 이번 달 말이나 11월에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출항 과정을 보자니 50년 전에 인류를 달나라로 보냈던 기술력과 도전정신이 도리어 더 위대해 보인다.

인류의 달 탐사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선장 닐 암스트롱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 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절정에 다다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엄청났던 것 같다. 텔레비전이 보급되지 않아 많은 사람이 달착륙 장면이 실황 중계되는 남산음악당에 몰려들었다. 며칠 후 명동의 백화점 쇼윈도에 설치한 텔레비전에서 재방송되자 앞쪽 육교에는 이를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급기야 그해 11월 3일 닐 암스트롱을 포함해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3인 모두가 한국을 친선 방문하면서 대한민국 전체가 우주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썩거렸다.

「 반복되는 원통형 기둥들
환영 가득한 우주적 미감
아폴로호 달 착륙에 영감
한국화단의 또 다른 자랑

이승조의 ‘핵 90-10, 90-11’, 1986~90, 캔버스에 유채, 230x700㎝. [사진 국제갤러리]

지금부터 반세기도 더 전에 불어 닥친 우주시대에 대한 기대감은 당시 한국의 기술력에 비춰보면 낯설고 막연한 것이었다. 우주라고 하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되는 동요가 먼저 떠오르던 때였기에 아폴로 우주선은 달나라만큼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한국엔 우주적 미감이라고 할 만큼 전위적 표현력을 갖춘 미술이 등장하고 있었다. 바로 SF 미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이승조 작가다. 때마침 그의 작품을 아우르는 전시가 삼청동 국제갤러리(30일까지)에서 열리고 있다.

이승조(1941~90)

이승조는 원통형 기둥을 주요 모티브로 삼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 같은 화풍을 1968년에 완성한다. 예를 들어 ‘핵 99’를 보면 원통 기둥 13개가 일정 간격을 두고 수평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각 원통형 기둥의 아래위로 균질한 음영이 들어가면서 원통 가운데가 밝아지는 방식으로 강한 둥근 입체감을 지니는데, 배경의 강렬한 그림자를 통해서 이 입체감은 더욱 강화된다. 균질한 음영과 배경의 강한 그림자 때문에 금속성의 메탈릭한 원형 기둥들이 마치 진공의 우주에서 부유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원형 기둥들은 기계로 찍어낸 듯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가 하나하나 붓으로 그려낸 것이다. 종이테이프를 이용해 외곽을 정해 놓고 폭이 넓은 평붓을 이용해 반복적인 붓질로 완성한 결과다. 화면 앞에 서면 기계같이 완벽해 보이는 기둥 하나하나가 미묘한 변화를 주면서 조용히 회전하는 듯한 극적인 환영감까지 준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우주시대의 영향에서 나왔다고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뜨고부터 시작한 이 작업이 작가인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 같아 끊임없이 매진하고 있다”고 했다.

‘핵 99’, 1968, 캔버스에 유채, 162x130.5㎝. [사진 국제갤러리]

이승조는 전위적 표현력을 갖춘 회화를 27살 이른 나이에 완성하면서 당시 국전를 비롯한 주요 공모전을 휩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세계에 확신하면서 원통형 기둥을 주제로 삼는 작품을 더 심화시켜 나간다. 안타깝게도 1990년에 채 쉰도 되지 않은 이른 나이에 요절하지만, 일찍부터 자기 작품에 확신을 품고 매진한 덕분에 생의 마지막 단계에는 대규모 작품들까지 완성해낸다. 이번 전시의 대미인 ‘핵 90-10, 90-11’ 앞에 서면 폭 7m의 초대형 화면에 압도된다. 1968년 제작된 ‘핵 99’와 비교해 기둥의 모티브는 계속되지만 표현력과 배열방식이 주는 긴장감은 더 팽팽해 보인다.

20세기 추상미술하면 피카소의 큐비즘(Cubism)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승조의 원통형 튜브의 ‘튀비즘(Tubism)’도 이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사각형 모티브의 큐브보다 원과 원기둥이 주는 충만감과 상징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이승조는 그것의 시각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미래적 미감으로 표현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승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지난 8월 5일 쏘아 올린 한국 최초의 달궤도선인 다누리호가 달나라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50년 전에는 우주 개발을 낯선 동경의 눈으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우리 기술을 기반으로 한 달탐사선을 제작해서 우주로 보내고 있다. 눈부신 발전에 감회가 없을 수 없는데, 이런 변화를 일찍이 예견하고 새로운 미감을 캔버스에 담아내려고 한 이승조라는 화가가 우리 화단에 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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