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도 생일잔치.. 청나라 멸망 이끈 서태후의 기행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군자가 여럿이 있어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데에는 소인 하나로도 족하다. '송사(宋史), 유일지전'에서 나온 말이다. 한때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자 중국사 최후의 왕조국가였던 청나라가 사실상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자리를 탐한 '소인'의 끝없는 권력욕에서 비롯됐다. 바로 중국 역사에서 희대의 악녀로 꼽히는 서태후(1835-1908)가 그 주인공이다.
10월 4일 방송된 tvN 역사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청나라를 몰락으로 이끈 악녀 서태후'편을 통하여 강대하던 청 제국이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손성숙 선문대 사학과 교수가 강연을 맡았다.
당시 한 만평에서 서태후는 '용을 타고 빗자루를 든 마녀'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주변을 열강들이 창을 겨누고 포위하고 있다. 중국의 공식 수장인 황제를 제치고 태후인 그녀가 열강에 맞서는 '주적'으로 묘사된 것, 또한 서구권에서 흔히 용과 마녀가 사악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서태후를 바라보던 서양인들의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한때 이런 서태후를 '여걸'로 미화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현대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서태후는 대부분 악녀로서의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2010년 중일합작드라마 <창공의 묘>에서는 주인공임에도 중국 여배우들이 하나같이 서태후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려서, 결국 중국인이 아닌 일본 배우인 다나카 유코가 캐스팅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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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는 어떻게 청나라를 장악했고 또한 멸망으로 가는 문을 열었을까. 서태후는 1851년 수녀선발제도를 통하여 청나라의 9대 황제인 함풍제(1831-1861)의 후궁으로 왕실에 처음 입성하게 된다. 중국에서 서태후의 정식호칭은 자희태후(慈禧太后)혹은 효흠현황후(孝欽顯皇后)이며 후궁시절에는 의귀비(懿貴妃)로 불렸다.
서태후는 그녀의 처소가 자금성의 서쪽에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별칭이며 한국인들에게는 이 호칭이 더 익숙하다. 당시 동쪽에 거주했던 동태후는 자안태후(효정현황후)로 불렸다. 특이하게도 서태후는 중국 역사상 유명한 인물임에도 실제 이름과 출신지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만주족 귀족 출신에 본명은 엽혁나랍 난아(葉赫那拉 蘭兒)로 알려졌지만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청제국 시대에 후궁의 등급은 황후 아래 7등급(황귀비-귀비-비-빈-귀인-상재-답응)이 존재했다. 후궁들은 등급과 총애에 따라서 지급받는 옷감의 수량과 품질, 음식까지 차별대우를 받았다. 귀인으로 책봉된 서태후와 달리, 함께 입궁한 동태후는 빈을 거쳐 40일 만에 함풍제의 두 번째 황후로 등극했다.
자존심이 상한 서태후는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하여 노력했다. 함풍제가 다니는 길목에 일부러 고양이를 풀어놓고 눈물을 지으며 찾는 연기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황제의 시선을 끌었다는 설 등은 어릴때부터 집요하고 치밀했던 그녀의 성격을 보여준다.
함풍제는 즉위 1년 전에 첫 번째 부인과 사별 이후 황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후궁들은 황실의 번영을 위하여 황제의 자손을 낳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함풍제의 눈에 든 서태후는 결국 입궁 4년 만인 22세에 가장 먼저 황제의 첫 아들을 낳는데 성공했다. 바로 청의 10대 황제가 되는 동치제(1856-1875)다.
서태후는 이로써 황후 다음가는 지위와 황자의 모후라는 영향력을 획득한다. 서태후는 황제의 더 많은 총애를 얻기 위하여 자신이 낳는 황자의 양육권을 황후인 동태후에게 양보한다. 인자한 성격의 동태후는 서태후를 질투하지 않았고 황자를 정성스럽게 양육했다. 이때만 해도 두 태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고, 동치제 역시 그런 동태후를 친모보다도 더 의지하고 잘 따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서태후는 드물게 글을 읽고 쓸줄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황제의 업무를 돕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정무와 익숙해졌다.
한편 당시 청 제국은 정치적 부패와 황권의 약화 속에 아시아 최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잃고 서서히 무너져가던 시기였다. 함풍제의 치세에 접어들며 태평천국의 난에 이어 1, 2차 아편전쟁을 겪으며 굴욕적인 텐진조약-베이징조약 등을 맺고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던 중화사상은 처참히 무너져내렸다.
1861년, 서구 열강들의 공격을 피하여 수도 베이징에서 열하로 몽진해있던 함풍제가 31세의 나이에 갑자기 병사한 것은, 서태후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동치제는 아직 5살에 불과했고 황제의 두 어머니인 서태후와 동태후가 나란히 섭정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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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풍제는 생전에 서태후를 견제하고 후계를 대비하기 위하여 동치제를 보좌할 8명의 고명대신을 임명했다. 또한 황제의 옥새를 이분화하여 동태후에게는 어상, 동치제에게는 동도장이라는 도장을 하사하여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마다 두 개의 직인이 모두 포함되어야 정식문서로 인정하도록 했다. 동태후와 동치제에게 8대신의 의견을 거절할 수 있는 거부권을 주어서 서로의 권력이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려는 장치였다.
하지만 동치제의 동도장을 실제로 차지한 것은 결국 모후인 서태후였다. 그녀는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과 동태후를 포섭하여 정적인 8대신을 모조리 제거하는 '신유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로써 두 태후와 공친왕이 동치제를 등에 업고 청 제국을 통치하는 '삼두정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두 태후는 명목상 공동 섭정이었지만, 동태후가 글을 모르고 국정에 무지했던 탓에 실질적인 정무는 서태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또한 공친왕은 '의정왕'이라는 직위를 얻어 대신들의 회의를 주관하고 태후들의 국정파트너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양무운동'을 지원하며 신문물 도입과 개혁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청 제국은 영국의 협력을 받아 오랫동안 골치를 앓아오던 태평천국의 난마저 진압하며 모처럼 평화를 되찾는 듯했고 이 시기를 청 제국이 잠시 국력을 회복했던 '동치중흥' 기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서태후는 '권력의 화신'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타깃은 공친왕이었다. 서태후는 동치제를 내세워 황제를 무시하고 교만했다는 혐의를 씌워서 공친왕에게 주어진 의정왕의 직위를 박탈한다. 공친왕은 높은 인망과 주변의 구명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최소한의 관직만 유지한 채 서태후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게 됐다.
또한 서태후는 아들인 동치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독점했다. 동치제는 성년에 가까워지자 황제로서 친정을 하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실권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서태후가 며느리이자 동치제의 아내인 효철의황후를 노골적으로 싫어하고 냉대했기에 고부관계에서도 갈등이 발생했다. 서태후는 학업을 핑계로 동치제와 황후의 만남조차도 금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자신처럼 황후가 동치제의 후계자를 낳을 경우 권력이 커져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어머니의 방해와 간섭에 무력감을 느낀 동치제는 주색에 빠져 방황을 거듭하다가 결국 재위 13년 만이자 결혼 3년 만인 1875년, 불과 20세의 나이에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사창가를 돌아다녔던 행적 때문에 그의 사인이 매독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또한 황후 역시 서태후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남편 사후 1년 만에 자결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아들과 며느리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어
아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 오히려 서태후의 권력욕은 더 강해졌다. 서태후는 황실계승서열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동치제의 3살짜리 사촌이자 본인의 조카가 되는 애신각라 재첨을 황제로 올렸으니, 그가 바로 광서제(1875-1908)이다.
서태후의 마지막 걸림돌은 동태후였다. 한 야사에 따르면 동태후에게는 생전에 함풍제가 "서태후가 아들을 믿고 권력을 남용하면 그녀를 죽이라"는 내용이 담긴 교지를 내렸다고 한다. 이를 알고 있던 서태후도 동태후를 끝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동태후가 아팠을 때 서태후가 자신의 피로 약을 지어주자 이에 감동한 동태후가 함풍제의 교지를 불태워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태후는 서태후와 경극배우의 성상납 스캔들, 동치제의 황후 간택 문제 등 중요한 정치적 이슈마다 그나마 서태후를 제어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광서제 6년인 1881년 43세의 나이로 동태후마저 요절하면서 이제 청 제국에서 서태후를 통제할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게 됐다. 공식적인 사인은 뇌출혈이었지만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서태후의 독살설이 나오기도 했다.
어릴때부터 서태후의 엄격한 훈육을 들으며 성장한 광서제는 항상 서태후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태후는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할 조카를 황후의 자리에 앉혔고, 황제에게 권력을 반환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서태후는 수많은 사치와 기행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서태후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새똥을 원료로 하는 옥용산이라는 화장품을 애용하는가 하면, 미백효과가 있다는 진주가루를 꾸준히 복용하고 달걀흰자와 돼지기름을 사용한 마사지를 즐겼다. 산모들을 데려와 얼굴을 가리게 하고 모유를 직접 마시기도 했다.
또한 머리치장에 유독 신경을 써서 며칠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기도 했는데 궁녀가 빗질을 하다가 실수라도 하면 바로 매질을 할 만큼 탈모에 예민했다고. 젊고 매력적인 남자들을 수시로 궁안에 불러들여 은밀한 밤을 즐겼다는 스캔들이 여러 차례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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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가 한창 사치와 권력에 탐닉하는 사이, 청 제국은 점점 무너져가고 있었다. 1894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패배는 청 제국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당시 청제국은 양무운동을 통하여 '북양함대'라 불리우던 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을 건설했지만 자신감이 넘쳤으나, 정작 '황해해전'에서는 쾌속선을 앞세운 신식 기동전술에 맞선 일본군에 완패를 당했다.
나라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청 황실은 1년치 예산의 3분의 1를 들여 서태후의 환갑연을 치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서태후의 사치에 쓰인 비용을 군사력 강화에 투입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일각에서 청일전쟁 패배의 원인이 서태후의 환갑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진지하게 거론된 이유다.
청 제국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은 상실한 것은 물론, 아편전쟁의 15배에 이르는 막대한 전쟁 배상금까지 안게 되며 재정이 파산 직전에 이르렀다.
또한 청 제국의 무력함을 두 눈으로 확인한 서양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이권 찬탈에 나서면서 홍콩, 청도, 여순 등의 영토를 잇달아 강탈당하게 된다. 위기의식을 느낀 청나라의 지식인과 개혁세력 사이에서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따 낡은 제도를 개혁하는 무술변법(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리고 그 개혁대상에는 서태후도 포함되어 있었다.
광서제는 신식군대의 수장이던 원세개를 포섭하여 서태후를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권력을 저울질하던 원세개는 광서제를 배신하고 서태후와 손을 잡았다. 서태후는 서양 열강과 관료들의 눈치를 보느라 광서제를 폐위하지는 못했지만 자금성에 감금시키고 실권을 박탈한다. 그리고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모조리 서태후에게 숙청당하면서 무술변법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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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태후는 서구 열강을 몰아내기 위하여 외세를 배척하는 민간무술집단인 의화단을 배후에서 지원한다. 의화단은 서구 열강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을 이용하여, 총대신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손오공을 신으로 숭상하며 서양인들에 대한 약탈을 일삼은 시대착오적인 불법폭력집단이었다.
분개한 서구 열강들은 연합군을 결성하며 청을 침공했고 오합지졸인 의화단과 청군은 속수무책으로 와해됐다. 당시 연합군은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곳곳에서 의화단 못지 않은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군은 1901년 '신축조약'을 맺고 책임자 처벌과 국가의 5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배상금을 약속받고 나서야 비로소 철군한다. 이는 이미 쇠락해가던 청 제국이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관련된 책임자들이 모두 처벌을 받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원흉이라라고 할 수 있었던 서태후는 주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권력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평생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살아야했던 광서제는 1908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훗날인 2008년에 그의 몸에서 비소 성분이 검출되며 독살 당한 것이 밝혀졌다. 그 배후로는 서태후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지만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서태후는 광서제 생전에 이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이자 3살 밖에 안 된 아이를 독단으로 황제에 내정한다. 그가 바로 청의 마지막 황제가 인 선통제(푸이)다. 서태후가 이미 광서제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선통제를 준비시켰다는 정황에서 독살설이 유력한 이유다. 실제로 서태후는 선통제가 즉위한 뒤에도 수렴청정을 이어갈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평생 권력에 걸쳐 무서운 집착을 보였던 서태후도 이기지 못한 것은 세월이었다. 서태후는 선통제를 세 운지 얼마되지 않아 1908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평생에 걸쳐 학대했던 조카 광서제가 죽은 지 불과 하루 만이었다.
서태후의 장례비용은 광서제보다도 3배가 더 들었다고 할 만큼 죽어서까지 사치를 누렸다. 그리고 서태후 사후 불과 4년 뒤, '신해혁명'이 발발하며 청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태후의 장례에 사용되었던 보석들은 훗날 도굴꾼들에게 의하여 무덤이 파헤쳐져서 모두 도난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심은 결국 한 나라 전체까지 파멸로 이끌어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혜로운 리더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하지만, 어리석은 리더는 권력 그 자체를 탐하는 데만 급급하다. 실제로 난세의 국가일수록 중요한 시대적 전환점에서 하필 무능하고 어리석은 소인같은 리더들을 만나 몰락을 더 앞당긴 사례는, 수많은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권력은 어떤 과정을 통하여 획득되고 또 유지되어야 하는지, 비슷한 역사의 고난을 경험했던 우리들에게도 서태후의 일생은 반면교사로서 많은 교훈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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