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더 선(The Sun)의 영광과 숙제
필자는 영국에서 17년을 살았다. 한곳에 오래 있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장소에 애증의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영국 특유의 칙칙함이 싫은 적도 있었지만, 필자는 요즘 영국이 그립다. 그리움의 대상은 꽤 다양한데, 그중 하나가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의 대명사인 더 선(The Sun)이다.
런던에 살 때 아침에 밖에 나가면 꼭 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더 선이었다. 최고의 인기를 얻는 신문을 사긴 쉽지 않았다. 상점 몇 군데를 들러 더 선을 겨우 살 때도 있었고, 아예 못 사는 날도 있었다. 다른 신문들은 쌓여 있는데 더 선만 다 팔린 경우도 많았다.
영국 대학교에는 전 세계에서 온 유학생이 정말 많다. 비(非) 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은 영어도 익힐 겸 영국신문을 자주 보는데, 이들은 꼭 더 타임스나 더 가디언 같은 퀄리티(quality) 신문을 산다. 그에 반해 영국에 꽤 오래 살았던 외국인들은 더 선도 즐겨 본다. 옷차림으로도 특정 사람이 영국에 얼마나 동화됐는지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신문만 봐도 그러한 추측이 가능했다.
더 선은 참 재밌는 신문이었고 가성비도 최고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문 가격이 꾸준히 올랐지만, 아무리 비싸도 한국 돈으로 700원 이상 지불한 적이 없다. 더 선은 스포츠, 연예계 뉴스와 더불어 온갖 가십과 스캔들, 그리고 다양한 만화, 독자 고민 상담 코너, 별자리 운세 등 가볍게 읽기에 최적화된 신문이었다. 필자는 더 선을 통해 영국사회나 서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물론 각종 화제성 기사를 특종으로 다루다 보니 더 선이 구설에 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스포츠와 관련된 대표적인 논란을 소개한다.
1989년 4월 15일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인 힐스브로에서 FA컵 준결승전이 열렸다. 리버풀과 노팅엄 포리스트가 맞붙은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리버풀 팬 2만 5000여명이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리버풀 팬 97명이 사망하고, 700명이 넘는 관중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터진다.
‘힐스브로 참사’로 알려진 이 사건은 영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영국 정부는 사고원인을 조사해 ‘테일러 리포트’를 만들었고, 축구장의 안전성과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문제는 당시 더 선이 힐스브로 참사의 원인을 몰지각한 리버풀 팬들의 소동으로 몰아간 것이다. 더 선은 사건 발생 나흘 후 ‘The Truth(진실)’이라는 헤드라인 기사로 리버풀 팬들이 피해자의 몸을 뒤져 귀중품을 훔쳤고, 사고 수습을 하던 경찰관들을 폭행했다는 내용을 특종으로 실었다.
당시 많은 영국인은 더 선의 보도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영국 정부는 재조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참사가 터진 지 23년만인 2012년 경기 주최측과 경찰의 잘못이 밝혀졌다. 이에 당시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케머런이 공식 사과했다.
한편 리버풀 시민들은 더 선의 편파적인 보도에 분노했다. ‘The Truth’ 기사가 나오자 하룻밤 사이에 리버풀이 위치한 머지사이드 지역에서 더 선의 판매고는 40% 급락했다. 머지사이드 주민들은 신문을 불태우는 등 조직적인 저항 운동을 계속 벌였고, 2019년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에서 더 선의 판매고는 80% 감소했다고 한다. 머지사이드 주민들이 대신 선택한 신문은 더 선의 1위 자리를 호시탐탐 노렸던 경쟁지 데일리 미러였다.
더 선의 자매지로는 일요일에만 발행하는 ‘뉴스 오브 더 월드(News of the World)’가 있었다. 2004년 이 신문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데이비드 베컴이 개인 비서 레베카 루스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특종을 보도했다. 사실 이 기사는 루스가 자신과 베컴의 스토리를 50만 파운드(7억 6000만원)에 뉴스 오브 더 월드에 판매했기에 가능했다. 이렇듯 유명인의 사생활을 타블로이드에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이들이 영국에는 꽤 있다.
1843년 퀄리티 신문으로 창간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한때 영어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이었다. 1984년 타블로이드로 변신한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유명인사나 연예인 특종, 가십 등을 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이 신문은 2006년 도청까지 해가며 유명인의 사생활을 캐다 적발되어 곤경에 처한다. 대중의 반발과 기업의 광고 철회가 이어지면서, 2011년 뉴스 오브 더 월드는 폐간했다.
한국의 스포츠신문과 달리, 영국 대부분의 타블로이드는 정치 성향을 드러낸다. 판매 부수가 워낙 많다 보니 이들이 갖는 정치적 영향력도 크다. 더 선은 전통적으로 영국의 보수당을 지지한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수상은 더 선의 영향력을 이용해 보수당 정권을 홍보하기도 했다.
더 선은 재치 있는 말장난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어, 2013년 조지 왕자가 태어나자 더 선은 신문명을 ‘The Son’으로 바꿨다.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더 선은 2016년 6월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별 인사인 See you later와 EU를 합친 문장인 ‘See EU Later’를 1면에 싣기도 했다.
영국 최고의 인기 신문인 더 선도 디지털 시대의 파고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다양한 뉴스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더 선을 포함해 영국 종이신문의 판매고는 급격히 줄어든다. 2011년 더 선의 하루 발행 부수는 300만이었으나, 2018년에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결국 더 선은 40년 동안 지켜오던 최고 인기 신문의 자리를 2018년 무료 신문인 메트로(Metro)에 내줬다.
더 선은 2020년 125만부를 기록한 이후 발행 부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퀼리티 신문인 더 타임스(37만부)와 더 가디언(11만부)도 2020~21년을 마지막으로 발행 부수 보도를 중단했다.
종이 신문은 결국 디지털화할 것이다. 스포츠신문도 팩트만 보도해서는 디지털 시대에서 승리할 수 없다. 간단한 팩트를 보도하거나 외신을 번역만 한 기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사건을 비판적으로 분석, 해석하고, 차별화된 콘텐츠를 가진 신문만이 앞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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