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눈에 선하게

2022. 10. 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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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진초록 자연이 이제는 노란빛과 주황빛을 조금씩 띠고 있다. 풀들은 더 이상 자라려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억새는 곳곳에 피어 가을의 느낌을 보탠다. 석류가 익어 가고, 감이 익어 간다. 내 집 마당에도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올해는 감이 많이 열렸다.

감나무 아래에 서 있던 아내가 감나무 그늘로부터 나오며 한마디 했다. “새가 열다섯 마리는 될 것 같은데, 한꺼번에 날아와서 감을 하나씩 쪼아 먹다 날아갔어요. 다 먹지도 않고. 세 마리당 감 하나씩 나눠 먹으면 좀 좋을까요.” 그 말을 듣고 감나무를 보니 여기저기에 새가 쪼아 먹다 남긴 감이 매달려 있다. 감이 달콤하고 맛있게 익어가는 가을날이다.

「 자연의 빛깔이 바뀌는 가을 절기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보고
떠올려 그리워하는 것의 갸륵함

농사짓는 일이 아직은 서툴러서 이웃에게도 물어보고, 농약사나 철물점을 들를 때도 농사일에 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지만, 오일장(五日場)이 서는 날이면 가끔 장에 나가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된다. 때에 맞춰 심어야 하는 모종이 무엇인지를 알 수도 있다. 내가 사는 제주시 애월읍에는 2일과 7일에 장이 선다. 며칠 전에는 대파와 쪽파, 배추 모종을 사 와서 밭에 심었다. 구절초와 야생화 용담도 사서 화단에 심었다. 용담은 여러해살이여서 신비한 이 자줏빛의 꽃을 해마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장날에 산 모종들과 꽃들은 노지(露地)에서도 월동을 한다. 한데에서 겨울을 난다. 제주도의 겨울 기온이 아주 많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다. 월동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벌써 겨울이 멀지 않았나 싶었고, 또 곡식이나 채소나 꽃이나 그 기르는 일은 한두 계절을 미리 내다보고 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육지에 살 때 알고 지내던 분들이 제주도로 여행을 와서 얼굴을 보러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집 바로 옆에 아내가 차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된다. 얼마 전에는 서울에서 함께 방송했던 방송작가가 남편과 함께 찾아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앞을 보기 어려운,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 영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원고를 쓰고 있다고 했다. 마치 영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눈에 선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참 좋은 일을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방송작가 부부와 헤어지고 나서 꽤 여러 날 동안 ‘눈에 선하게’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면서 뭔가 그리움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최근에 쓴 나의 졸시 ‘모자’도 생각났다.

‘그이가 모자를 내 집에 놓고 갔네/ 나는 아침저녁으로 모자를 보네/ 모자를 쓰고 집안을 돌아다니기도 하네/ 날이 갈수록 그이 생각이 간절하네/ 모자챙에 가려져 있던 서글서글한 눈매/ 파초 잎 같은 귀/ 모았다 찬찬하게 움직이던 손/ 연한 빛깔의 미소/ 말없이 앉아 있던 뒷모습/ 나는 오늘도 모자를 보네/ 가는 선(線)을 잇고 이어 그이의 얼굴을 그리네.’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찾아 왔는데, 돌아가는 길에 그만 깜빡하고 모자를 내 사는 집에 놓고 갔다. 그 모자를 아침저녁으로 보다 보니 그 사람 생각이 점점 간절해지면서 그 사람의 모습과 행위와 성품이 어느 때에는 눈앞에 아른거리고, 또 어느 때에는 눈에 선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어느 때에는 잔무늬 같았고, 또 어느 때에는 희미한 그림자 같았고, 또 어느 때에는 생생하게 보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새로운 것을 보고 겪기도 하지만 과거에 보고 겪은 것을 떠올려 기억해내기도 한다. 또한 보고 겪은 옛일을 떠올려 잠깐씩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도 하지만, 예전에 본 것을 기억하고 떠올려보는 것으로 현재를 살아가기도 한다. 사진의 한 컷과 같은 풍경을 떠올려서 보기도 하고, 혹은 옛일의 서사를 떠올려 보기도 한다. 기억의 힘에 의해서도 현재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나는 고향집 풍경을 떠올려 향수를 달랜다. 사철나무 울타리와 한 그루의 높은 감나무, 어머니께서 가꾸는 잎이 둥그스레하고 넓은 토란잎 등을 떠올린다. 어머니께서 비질하는 모습이나 아버지께서 풀을 뽑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는 두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하고 이처럼 심안(心眼)을 통해 보기도 한다.

시각이라는 감각 작용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을 위해 ‘눈에 선하게’ 영상을 설명해주는 일도 어진 일이요, 옛일을 기억해내도록 도와주는 일도 어진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뭔가를 그리워하는 일도 근사한 일이다. 물론 옛일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섞여 있지만 말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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