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박9일 걸어야 완주..한국엔 석탄 나르던 운탄고도 있다

박진호 2022. 10. 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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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운탄고도 5길. 과거 광부들이 캔 석탄을 나르던 길로 광부와 아내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는 곳이다. [사진 강원도관광재단]

지난달 28일 오후 강원 영월군 김삿갓면 주문2리 ‘구름이 모이는 동네’라는 뜻의 모운동(暮雲洞) 마을. 30여 명의 관광객이 ‘운탄고도(運炭高道) 마을호텔’ 앞에서 트레킹을 준비했다.

운탄고도 3길을 걷기 위해 모운동을 찾은 이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방역 최일선인 강원도 시·군 보건소에서 근무한 공무원이다. 이들은 이날 ‘치유의 걷기’ 길을 시작으로 29일엔 해발 1330m ‘만항재’와 ‘도롱이 연못’이 있는 운탄고도 5길을 걸었다.

임상미 강원도인재개발원 주무관은 “3년이란 시간 동안 방역 최일선에서 고생한 이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치유를 위해 운탄고도 걷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며 “잠시나마 근무지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해발 700m가 넘는 고지대 모운동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지금은 30여 가구 5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망경대산의 ‘옥동광업소’가 문을 닫기 전인 1980년대 후반까진 1만 명이 넘는 광부 가족이 살던 번성한 마을이었다.

당시엔 병원은 물론 극장과 당구장·미장원·세탁소 등 없는 게 없는 시끌벅적한 동네였다. 모운동에서 60년 넘게 산 김두하(81·여)씨는 “예전엔 학교를 오전·오후반으로 나눠가는 2부제를 했을 정도”라며 “시내에 없는 물건이나 상점도 여기에는 다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날 모운동에선 운탄고도를 스토리텔링 한 김도연 작가도 우연히 만났다. 그는 1979년 석탄 산업이 호황을 이루던 모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마가리 극장의 저자다. 김 작가는 “몇 년 전 우연히 이 마을에 오게 됐는데 동네가 너무 예뻐서 (소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며 “이 동네에 살던 광부 자식들이 극장에 다니던 이야기를 쓰고 운탄고도 스토리텔링에도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행자들이 운탄고도 3길 시작지인 모운동으로 모여드는 건 이곳부터 실제 석탄을 나르던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운동이 운탄고도의 시작지인 셈이다.

강원도관광재단은 지난 1일 ‘운탄고도1330’ 정식개통을 기념, 모운동에서 출발하는 ‘운탄고도1330 느리게 걷기 행사’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모운동에서 영월 석항 삼거리까지 약 12.8㎞를 걸었다. 행사는 9일까지 이어진다.

운탄고도1330은 영월군·정선군·태백시·삼척시 등 폐광지역 시·군 4곳을 잇는 길이다. 이름 뒤에 1330이 붙은 건 전체 코스 중 가장 높은 곳인 정선 만항재(1330m)에서 따왔다. 영월 청령포에서 시작된 길은 삼척 소망의 탑까지 9개 길로 나뉘어 있다. 총 길이만 173㎞에 달한다. 모든 코스를 걸어서 이동하면 8박 9일이나 걸린다.

운탄고도따라 걷다 보면 다양한 명소를 감상할 수 있다. 영월 청령포에서 각동리로 이어지는 15.6㎞ 운탄고도 1길은 성찰과 여유, 이해와 치유의 트레킹 코스다. 열일곱 살 어린 나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 단종의 넋이 서린 청령포에서 시작해 동강을 따라가다 보면 4억년 전 자연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한 고씨동굴에 닿는다.

운탄고도 2길은 방랑으로 평생을 살았던 김삿갓과 함께 걷는 길이다. 모운동까지 18.8㎞ 코스다. 늘보마을과 포도마을을 지나 와인 향기가 풍기는 예밀촌에서 한숨을 돌린 뒤 가파른 길을 오르면 모운동이 나온다. 운탄고도 3길은 모운동에서 정선 예미역으로 가는 16.83㎞ 코스다.

운탄고도 4길은 정선 예미역에서 정선 화절령을 잇는 28.76㎞ 코스다. 전지현과 차태현이 주연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엽기소나무’가 있는 새비재 정상 ‘타임캡슐공원’에서 두위봉을 거쳐 종착지인 화절령에 이르는 길은 트레킹의 재미가 남다르다.

화절령에서 함백산 만항재까지 15.7㎞ 운탄고도 5길은 광부와 광부 아내의 높고 애틋한 사랑의 길이다. 광부를 남편으로 둔 아내들의 애타는 마음이 담겨 있는 도롱이 연못과 캄캄한 막장으로 들어가는 갱도의 입구인 ‘1177갱’이 있다.

운탄고도 6길은 함백산에서 태백 산업전사위령탑으로 이어지는 16.77㎞ 코스다. 사냥꾼들이 멧돼지를 잡은 뒤 돌을 달궈 구워 먹던 지지리골 자작나무 숲을 지나 내려가면 한때 번성했던 탄광촌인 상장동 벽화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운탄고도 7길은 산업전사위령탑에서 시작해 통리를 거쳐 삼척 도계역(18.63㎞)으로 이어진다. 통리역은 태백에서 내륙과 바다의 산물이 만나는 곳이었다. 통리역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너무 심해 기차가 멈춰야만 했다. 승객들은 걸어서 고갯길을 오르내렸고 화물열차는 쇠밧줄로 한 량씩 끌어서 올리거나 내려보냈다고 한다.

7길에선 ‘미인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미인폭포는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지질학적 특성이 비슷해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통리 협곡 내에 위치한 폭포다. 석회질 성분으로 인해 물빛이 신비롭고 이국적인 비취색이다.

운탄고도 8길은 삼척 도계역과 신기역 16.94㎞를 연결한다. 아직도 검은 석탄가루가 날리는 도계역 까막동네를 지나면 지금은 폐역이 된 고사리역, 마차리역을 볼 수 있다.

운탄고도 마지막 9길은 삼척 신기역에서 새천년도로 소망의 탑(25.15㎞)으로 이어진다. 동해를 품은 새천년도로를 걷다 보면 새천년의 소망을 담아 2000년에 건립한 소망의 탑이 나온다. 소망의 탑은 운탄고도의 최종 종착지다.

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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