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사 최후의 졸업생.. "국가를 위해서? 중요치 않았다" [일본史람]

박광홍 입력 2022. 10. 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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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史람] 패전 후 시베리아 포로생활 한 타카하시 마사루씨 "피할 수 없는 전쟁 감당"

[박광홍 기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일본-러시아 관계가 요동치는 가운데, 일본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가 새삼 회자되기도 한다.

1945년 8월,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만주와 남사할린, 치시마열도(현 러시아령 쿠릴열도)로 진격해 들어간 소련군은 일본군 포로 60만 여 명을 시베리아, 몽골 등지로 보냈다. 2000여 곳에 달하는 수용소에 분산 수용된 일본군 포로들은 철도건설, 탄광노동, 농업 등에 투입됐다. 억류기간동안 중노동이나 학대, 위생시설 미비, 역병 유행 등으로 사망한 일본군 포로는 5만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7만 명만이 살아서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빈농의 아들, 일본육사에 진학하다
  
▲ 인터뷰에 응하는 타카하시 마사루(96)씨 타카하시 마사루 씨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타카하시 씨는 전쟁을 비롯해 자신의 생애사 관련 유물들을 모아 사설박물관 형태로 공개하고 있다.
ⓒ 박광홍
 
지난 25일 만난 효고현 탄바사사야마시의 타카하시 마사루(高橋勝, 96)씨 역시 패전 후 소련군에 의해 2년 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기억을 갖고 있다. 기자의 명함에 적힌 '박(朴)씨' 성을 본 타카하시씨는 대뜸 "박정희 대통령의 친족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에게 있어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육군사관학교 1년 선배다. 일본이 패전했던 1945년에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육사 최후의 졸업생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가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타카하시씨는 "돈이 없어서 육사에 갔다"고 말한다. 장교를 양성하는 육군사관학교는 학비가 무료였고, 숙식·피복도 무료였으며 소정의 봉급도 나왔다. 그는 오직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천황 폐하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사실 그런 건 중요치 않았어요. 우리 집은 돈이 없었고,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사관학교에 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명석했던 농촌 중학생은 엄청난 경쟁을 뚫고 1941년 육군예과사관학교에 합격했다. 빈농의 아들로서 육군예과사관학교에 합격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큰 자랑거리였다. 입교식에는 천황이 행차하고 세계 각국의 대사들과 주재 무관들까지 찾아왔다. 일본 육군이 제국의 몸통 그 자체였던 그 시대에 육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 그 이상의 의미였다.

그러나 영광은 순식간에 짓밟혔다. 입학식이 거행된 바로 그 날, 타카하시씨는 선배로부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구타를 당했다. 선배는 타카하시씨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는 트집을 잡으며 뺨을 후려쳤다. 창졸 간의 따귀에 정신이 흐려지는 가운데, 타카하시씨는 그곳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괴롭고도 어처구니없어서 그냥 집에 돌아가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숱한 난관을 뚫고 합격해서 입교식까지 치른 마당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온갖 부조리들을 꾹꾹 참고 학업을 이어간 티카하시씨는 이내 예과사관학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2년 간의 예과 과정을 마친 타카하시씨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갈 수 있다는 육군항공사관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의 나이 17세, 1943년의 일이었다.

일본육사 최후의 졸업생, 시베리아행 열차에 태워지다
 
▲ 타카하시 씨의 육군항공사관학교 졸업장 1945년 3월 20일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졸업한 타카하시 씨는, 일본이 그 해에 패전함에 따라 최후의 일본육사 졸업생 중 한명이 되었다.
ⓒ 박광홍
 
육사를 졸업한다면 본인이 당장 전쟁에 투입될 입장이었음에도, 타카하시씨는 일본의 전쟁에 대해 어떤 투철한 신념을 갖지는 못했다. 미군의 공습으로 일본 본토가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서도, '먼저 미국을 공격하고 각 지역을 빼앗은 것은 일본'이라는 점을 생각하니 그들을 마냥 증오할 수는 없었다고 타카하시씨는 말한다.

교육칙어(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며 국가를 위한 신민의 헌신을 요구하는 내용), 군인칙유(군인을 천황의 신하로 규정하고 복종과 헌신을 요구하는 내용), 전진훈(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하는 내용의 육군 신조), 귀축미영(미국인과 영국인을 귀신과 짐승에 비유하는 전시 일본의 프로파간다) 등 당시 일본군 장병들을 옥쇄로 내몰았던 수많은 구호들은 어르신에게 있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당면할 뿐이고, 그것은 상대인 적 장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1945년 3월, 육사를 졸업한 뒤 항공대로 실무배치된 19살의 타카하시씨는 일본 육사 최후의 졸업생이 됐다.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제국 일본은 우수한 젊은 장교들을 온존시키기 위한 방침을 수립했다. 저항세력이 소탕되고 국경을 면하고 있는 소련과도 중립조약이 맺어진 만주는 그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타카하시씨는 한 달만인 4월에 만주로 배속됐지만, 타카하시씨의 만주행은 비극으로 귀결됐다. 8월 9일,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어왔던 소련의 군대가 만주를 침공한 것이다.

'절대로 패전할 리 없다'는 '신의 나라' 일본이 패전했다. 충격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라'고 교육받았던 병기들을 중국인들에게 빼앗겼을 때의 당혹감과 허무감만이 현실을 비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새벽, 무장한 소련군 병력들이 타카하시씨와 그의 부대를 깨워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열차에 태웠다. 악명높은 시베리아행 열차였다.

"당신은 포로 생활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을 겁니다"
  
▲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2011)에 묘사된 시베리아 억류 패전 후 60만의 일본군 포로가 소련군에게 억류되어 5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 마이웨이 스틸컷
 
콩나물 시루처럼 실린 포로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시베리아로 향하는 길의 극악한 환경을 견뎌야 했다. 기본적인 보온이나 위생, 먹을 것은커녕 마실 물조차 기대할 수 없었던 머나먼 길을, 어떤 이들은 끝내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열차가 멈출 때면 포로들은 물을 찾아 절규했다. 물이 더러운지 깨끗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달여의 열차 생활을 간신히 견뎌낸 끝에 닿은 곳은 시베리아의 척박한 탄광이었다. 타카하시씨와 전우들은 소련군의 지시에 따라 탄광굴을 파며 기약없는 억류생활을 보냈다. 기온이 영하 30℃까지 떨어지는 극한의 환경에서 중노동을 강요당하면서도, 지급되는 식사는 너무나도 부실했다. 목욕은 한 달에 한 번만 허락됐다. 이때 한정된 목욕물로 빨래까지 모두 해결해야 했다.

"한국은 전쟁에서 패전한 적이 없으니 포로 생활이란 게 어떤 것인지 당신은 알 수 없을 겁니다."

타카하시씨는 소련군의 부당한 대우에 참다 못해 소련 감시병에게 주먹을 날렸다고 한다. 즉각 응징이 돌아왔다. 구덩이에 감금된 그는 10일간 배식도 받지 못했다. 꼼짝없이 죽을 뻔 했던 그를 살려주었던 것은, 자신들의 부족한 음식을 십시일반 덜어내 몰래 구덩이에 넣어주었던 전우들의 정성이었다고 한다.

해방의 날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시베리아로 보내졌던 그 날처럼,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열차에 실린 포로들은 마침내 귀국선에 오르게 됐다. 억류 2년만의 일이었다. 타카하시씨와 전우들은 귀국선 위에서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온 귀환장병들에게, 국가는 보상금 명목으로 각각 300엔을 내려줬다고 한다. 당시 담배 한 갑이 50엔. 담배 6갑 값이 시베리아 억류의 대가였던 셈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됐다가 패전 후 패전국의 멍에를 지고 강제노동까지 강요받았던 귀환장병들의 삶은, 국가로부터 외면 받았다.

청년의 뒤틀린 청춘
  
▲ 타카하시 마사루 씨의 옛 사진들 좌: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을 때의 사진. 중앙: 중학생 때의 사진. 우: 견습사관 때의 사진.
ⓒ 박광홍
 
그러나 괴로움과 허무함 너머로도 삶은 계속돼야만 했다. 고향에 돌아와 농업협동조합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육사 선배들이 일본과 한국의 정계에서 이름을 드날리던 시절에도 고향 땅을 일구며 평생을 조용히 보냈다. 전쟁 체험과 시베리아 억류생활의 경험으로 몸에 벤 절약정신은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유별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묵묵히,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왔음을 자부한다.

타카하시씨는 자신이 그저 살아내야 할 삶을 살아냈고 피할 수 없는 전쟁과 포로생활을 그대로 감당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전쟁 당시 미국인들을 미워하지 못했듯이, 시베리아 억류의 주체인 러시아인이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는다. 제국시대의 반공교육이나 시베리아 억류 체험에도 타카하시씨는 전후 일본에서 힘을 얻었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심드렁하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공산당이 뭐 내 알 바인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한다니 표를 얻었던 것이겠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 전쟁의 몸통이었던 육군의 엘리트 장교, 시베리아로 끌려가 수난당한 포로 그리고 뒤틀린 청춘을 뒤로하고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 청년. 근현대 일본사의 숱한 군상들이 타카하시 마사루라는 개인의 삶에 함축돼 녹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면 과언일까. '그저 살아내야 할 삶을 살아냈고 피할 수 없는 고난을 그대로 감당했을 뿐'이었던 것은, 타카하시씨 개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수많은 민중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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