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트루먼 플랜'이 '마셜 플랜' 된 이유

2022. 10. 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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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숙 전 국회의원


동서 냉전의 기운이 퍼져나가던 1946년 여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헨리 월리스 상무장관으로부터 한 연설문을 보고받았다. 트루먼은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대표적인 진보파였던 월리스의 연설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거침없는 세력 확장에 나선 소련을 좀 더 이해해야 한다는 소련 동정론이었지만 그러한 월리스의 주장이 트루먼의 노선과 일치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그렇다고 했다. 그 연설에 대해 비난이 빗발치자 트루먼은 그저 연설만 허락한 것이었다는 군색한 변명 끝에 결국 월리스를 경질해야 했다. 그는 “실수하는 자여, 그대 이름은 트루먼이다”라는 조롱에 시달렸고 지지율은 32%까지 떨어졌다. 이어 치러진 중간선거에서도 참패해 민주당은 16년 만에 공화당에 의회권력을 넘겨줘야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레임덕뿐이라고, 트루먼은 끝났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47년 트루먼의 지지율은 60%까지 반등했다.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천명한 ‘트루먼 독트린’과 서유럽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인 ‘마셜 플랜’이 미국 내 여론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유럽에 총 130억 달러를 지원하는 계획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소수파 대통령 트루먼은 2차 대전 당시 참모총장으로 존경받았던 조지 마셜 국무장관을 앞세웠다. 그렇게 트루먼 플랜 대신 마셜 플랜이란 이름으로 공화당의 협력을 끌어냄으로써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실수하고 지지율 바닥을 치는 게 트루먼뿐이겠는가. 그러나 트루먼은 야당과 국민을 설득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바닥으로부터 회생했다. 모든 대통령은 성공을 꿈꾸지만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에 이르기도 한다.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권력이 자신의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해관계자들과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정책결정자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외엔 없다. 대통령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자문위원을 지낸 리처드 E 뉴스타트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대통령의 권력(Presidential Power: The Politics of Leadership)’에서 대통령은 멋진 부츠를 신고 말에 올라탄 지휘관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마차를 모는 마부라고 했다. 각 부처 장관들과 여야 의원들을 마차에 태워 하나의 방향으로 가자고 설득하는 것이 대통령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관계자들과 연계돼 있어 제각각 다른 길로 가려 하는 만큼 한 마차에 태우기도 힘들고 중도 이탈 없이 목적지까지 함께 가기도 어렵다. 그래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결코 지도력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권력은 곧 설득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대통령은 지배자가 아니라 설득자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유다. 실패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대통령 자신이 찾아야 한다. 뉴스타트 교수가 강조한 것처럼 ‘self help’, 오직 대통령 자신만이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혹여 윤석열 대통령 주변에 ‘여기서 밀리면 절대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참모가 있다면 그 사람부터 정리해야 한다. 대통령직은 야당이나 국민과 줄다리기하거나 전쟁하듯 싸우는 자리가 아니다. 여권 일각에서 15년 전 ‘광우병 사태’를 소환하는 것은 잘못된 학습 효과를 보여준다. 당시에도 문제는 언론 보도가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 대통령과 정부의 설득력 부족이었다. 실제로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하다”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누군가는 대통령을 향해 ‘부끄러움은 정녕 국민 몫이냐’고 몰아붙였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오롯이 대통령 몫이다. 대통령이 부끄러움을 딛고 지금이라도 국민과 국회에 이해를 구하는 설득자의 자세로 돌아오길 바란다. 국민의 상처받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에게 남은 임기는 길고, 대한민국과 국민이 겪어야 할 오늘의 현실 그리고 내일의 미래는 진정 험한 시간들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서 선물받은 트루먼 팻말에 새겨진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말대로, 지금은 바로 윤 대통령이 책임질 때다.

박선숙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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