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연애 상담
남 연애 구경에 빠졌다. 회사 동기 카카오톡 단체방에선 매주 알람처럼 “봤어?”라는 말로 논쟁이 시작된다. 요즘 인기인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프로그램이 있지만, 일반인 남녀가 일정 기간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짝을 찾는다는 기본 설정은 같다. 카메라 앞이 익숙지 않은 출연진의 날것 감정이 화면 속에 피어오를 때마다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지난주는 A에게 미련을 보이는 B에게 감정이입해 같이 울다가 이번 주는 데이트에서 잘 보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C를 보며 ‘대리수치심’을 느낀다. A 편이냐, B 편이냐. C도 이해되더라. 기자들의 단톡방에선 쓸데없이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몰입하다가도 TV를 끄면 부담 없이 내 인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은 그런 예능의 매력이다. ‘쟤 마음은 어떻’고, ‘왜 그렇게 구는’지가 적나라하게 담기니 공감하기도, 비난하기도 간편하다. 게다가 어떤 결과든 그건 출연진과 제작진의 책임이고, 구경꾼인 나는 발 닦고 잠이나 잘 자면 된다.
막상 친구 연애상담도 선뜻 자처하기 어려운 게 현실의 삶이다. 5분의 잠, 5분 이른 퇴근이 목표인 일상에선 다른 사람 인생의 수수께끼에 내 시간과 감정을 내줄 여유가 잘 없다. 조언엔 책임감도 따르니 공감에 드는 품이 너무 크다.
과도한 감정이입은 확실히 이 시대 감성은 아니다. 최근 뉴스에 등장한 신조어 ‘누칼협’이 그 단면이다. ‘누가 칼 들고 그렇게 하라고 협박했냐’의 줄임말인데, 타인이 처한 악조건에 대해 ‘네 선택이니 결과도 네가 책임지라’는 뜻으로 쓰인다. ‘누물보(누구 물어보신 분)’ ‘악깡버(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지팔지꼰(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 같은 표현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 먹고살기 바쁜 팍팍한 세상에서 남의 고민에 개입하는 건 감정의 낭비로 여겨진다.
그래도 가끔은 그 감정 낭비가 그립다. 상담사를 자처하던 학창 시절, 온갖 경우의 수를 그려가며 주변에 한껏 이입했던 시간은 돌아보면 내가 무너질 때 두 배의 다정함으로 돌아오곤 했다. 다른 사람 마음에 들어가 온전히 그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 대처에서 빛을 발했다. 풍요로운 낭비였다.
어쩌면 OTT 시대에도 연애 리얼리티 예능이 시청률을 꾸준히 갱신 중인 건 사실은 공감받고 싶은 시청자들의 욕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A, B, C의 삼각관계에서, ‘누칼협’의 세상에선 위로받지 못한 초라한 과거의 나를 발견했을지도…. 공감은 이 세상은 못 구해도 가끔 나 자신은 구한다. 예능은 잠시 끄고 친구에게 전화해 인생 상담이라도 자처해볼까 싶다. 혹시 아나. 그 낭비가 언젠가 내 인생에도 닥칠지 모를 비슷한 경험에 나침반이 되어줄지.
성지원 정치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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