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수험생에 '도형' 문제 풀라던 때.."눈앞이 캄캄했다"
“엄마, 눈에 그림자가 생겼어.”
문성준(54) 대전맹학교 교장은 40여 년 전 어느 날 눈의 일부분이 암막 커튼을 친 것처럼 검게 보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뭐가 묻었다고 생각했는데, 검은 부위는 점점 커져 나중에도 빛도 감지할 수 없게 됐다. “막막한 일이 생겼을 때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 쓰잖아요. 저는 실제로 그걸 경험했어요. 그때의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눈 속 망막이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망막박리’라는 질병이었다. 부모님은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두 달 동안 수술과 치료를 병행했다. 하지만 시력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문 교장은 하루아침에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전맹’(全盲) 시각장애인이 됐다.
망막박리 뒤 시력 완전히 잃어
부모님과 가까이 지내고 싶어 고등학교는 서울맹학교에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기에 자연스레 대학에 진학할 마음을 먹었지만, 교재를 구하기부터 쉽지 않았다.
“점자로 된 대입시험 교재를 구하려면 최소 6개월을 기다려야 했어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교재 낭독 봉사활동을 했는데, 거기 참여해서 형‧누나들이 읽어주는 내용을 점자로 요약하고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죠. 교재 낭독에 참여하기 위해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잦았지만, 그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었기에 배고픔을 참아가며 죽기 살기로 공부했죠.”
대입시험·교직생활 고난의 연속
하지만 대학입학 학력고사 시험장에서도 좌절감을 맛봤다. 점자로 표현할 수 없는 도형‧그림 문제는 시험지에 내용이 아예 생략돼 있어 보기 중 하나를 ‘찍는’ 수밖에 없었다. 눈이 보이면 당연히 맞출 수 있는 문제도 틀리다 보니 평소 실력보다 30~40점(300점 만점) 낮은 점수를 받았다. 지금은 대입에 장애인 특례제도가 있어 장애인끼리 입시를 치르지만, 당시에는 장애인‧비장애인을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는 ‘불공정’ 경쟁이었다.
교사의 꿈을 갖고, 대구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했지만, 자원봉사자가 없는 캠퍼스 생활은 또 다른 고난이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선배가 지금 문 교장의 아내 송미령씨다. 송 씨는 밤을 새워가며 교재 내용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줬고, 문 교장은 그 내용을 수십 번 반복해 들으며 공부했다. “덕분에 한 학기를 제외하고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임용고사에 합격해 1993년 대전맹학교에 발령을 받았지만, 교직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일반 교사들이 1분이면 하는 출석체크도 그에게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웠다. 출석부의 결석한 학생 이름에 ‘V’ 표시를 해서 다음 수업 담당자에게 전달해줘야 하는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혼자 힘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시각장애인 정보 접근성 확대 노력
또 2003년 정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구축에 참여해 음성서비스 지원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각장애가 있는 교사들은 학교생활기록부‧성적 등을 수기로 작성해야 해 어려움이 많았는데, NEIS 음성서비스 지원으로 비장애인 교사처럼 교무‧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게 가능해졌다.
2007년에는 온라인소리도서관 ‘누리샘’을 기획해 시각장애 학생들의 독서 활동을 도왔다. 현재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시각장애인도 원하는 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당시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동네에서 목소리 좋다는 사람 10명을 불러 모아서 책 내용을 녹음하고, 온라인도서관에 업로드 해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어요. 지금은 인력‧관리 문제로 폐지됐지만, 그사이 기술이 발달해 시각장애인도 쉽게 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제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1일 자신의 모교이자, 첫 교직생활을 시작한 대전맹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한 그에게는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장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리 한쪽을 잃은 지체장애인이 ‘철인 3종’(수영‧사이클‧마라톤) 경기에서 완주했다고 하면 박수를 치지만, 그 사람을 위한 자전거를 만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장애인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개선점을 찾을 때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아지지 않을까요.”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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