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떠난 자리.. '기후 열강'이 눌러앉다

한명오 2022. 10. 1.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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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땅' 아프리카 사헬
기후위기가 부른 기아·극단주의
이상기후 영향 100만명 이상 아사
정치 불안에 IS 활개.. 테러 일삼아
게티이미지뱅크


“기후변화에 책임이 없는 세계 최빈국들이 가장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합니다.”

프레밍 묄러 모르텐센 덴마크 개발부 장관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본부에서 열린 제77회 유엔총회 일반 토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염 물질을 거의 배출하지 않는 가난한 나라들이 기후변화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는 이런 나라에 보상 차원에서 1300만 달러(약 180억원)를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의 기후 피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덴마크가 보상 대상으로 지목한 곳은 아프리카 서북부 사헬(Sahel) 지역과 기타 기후변화 취약 지역이다. 덴마크는 왜 사헬을 콕 찍어 지원 의사를 밝혔을까.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

사헬은 사하라사막과 그 남쪽 아프리카의 경계를 서에서 동으로 잇는 긴 띠 모습의 지대다. 아프리카 서부 세네갈에서부터 말리, 니제르, 차드, 수단, 동부 에티오피아, 지부티까지 약 640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이다. ‘사헬’은 아랍어로 가장자리라는 뜻이다.


사헬에 위기가 처음 찾아온 것은 15세기 중반 무렵이다. 서유럽 국가들이 이곳에 들어와 노예무역이 성행하자 인구가 급감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 영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가 시작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 지역 국가들은 하나둘씩 독립했으나 열강이 떠나간 자리엔 정치 불안과 빈곤, 기아가 남았다.

20세기 중반부터 자연환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북부의 사막은 남부로 퍼져가고 있다. 미국 메릴랜드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사하라 사막은 100여년 사이 미국 땅만큼 면적이 더 넓어졌다. 바다처럼 넓은 ‘아랄해’ 호수는 종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호수인 ‘차드호’도 40년 동안 물이 증발하면서 수면 면적이 2만6000㎢에서 1350㎢로 줄어든 상태다.

기후가 달라진 탓이다.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실의 지난해 11월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 기온은 지구 평균보다 1.5배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우기가 줄고 있는데 사헬의 오른편인 아프리카 북동부는 우기 때도 비가 제대로 내리지 않아 물 부족이 심해지고 있다.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해온 사헬 인구 대부분은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유엔은 지난 5월 “사헬 지대에서 1800만명이 심각한 기근을 맞닥뜨렸다”고 밝혔다. 1970년부터 50년 넘게 이어진 가뭄은 그동안 100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기후변화가 낳은 갈등과 폭력
아프리카 중앙에 위치한 내륙국가 차드의 유목민 주거지. 사하라 사막을 돌아다니며 살아온 유목민들은 기후변화로 사헬 지역의 사막화가 진행 됨에 따라 삶의 터전을 점점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사헬 지대 국가에서는 1960년부터 30년간 매년 평균 4건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정치 불안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도 기니 수단 차드 말리 4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최근에는 이슬람 극단주의가 사헬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테러 단체들이 2014년을 전후해 이곳으로 남하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알카에다, ‘이슬람국가(IS)’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사헬 지역 주민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 연구소는 지난 3월 보고서에서 사헬 지역의 여러 갈등이 기후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말리의 사례로 둘 사이 연관성을 보여줬다. 말리 니제르강 삼각주에서는 농부와 목축민이 오랫동안 공존했다. 농부는 쌀농사를 지었고 목축민은 소의 사료로 쓰이는 ‘부르그’를 재배했다. 1950년대 이후 강우량이 줄어 부르그 밭의 4분의 1이 논으로 바뀌자 농부와 목축민 사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한 갈등은 분쟁으로 번졌지만 이를 중재할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목축민의 종족인 풀라니족과 투아레그족은 말리 북부의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담하고 있다.

2000년 이후에는 무장단체의 납치 사업이 벌어지고 있다. 2019년 한국인 한 명과 프랑스인 두 명이 부르키나파소의 무장단체에 인질로 잡혔다. 2020년에는 니제르에서 사파리 여행에 나선 프랑스 관광객 6명이 습격을 받아 모두 사망했다. 분쟁지역 연구자인 니시비아는 “이들에게 외국인은 몸값을 흥정해 돈을 챙기기 적절한 표적”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프랑스군 주둔하다 지난달 떠나

과거 이 지역을 식민통치했던 프랑스는 테러와 사회 불안정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적극적으로 동원했다. 프랑스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저지를 목적으로 2013년부터 일명 ‘바르칸 작전’을 통해 군 병력을 아프리카 말리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지난해 1월 민간인 사살 논란이 불거진 뒤 프랑스군은 말리 정부와 사이가 틀어져 지난달 15일 말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러시아는 프랑스군이 떠나간 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영향력 확장과 사헬 지역의 천연자원 확보를 위해서다. AF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캐나다 등 15개국은 지난해 12월 “말리에 러시아 바그너그룹이 파견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바그너그룹은 푸틴 정권을 돕는 러시아의 민간군사기업으로 잔혹 행위를 일삼아 ‘푸틴의 요리사’로 불린다.

유럽연합(EU)은 이 지역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2017년 사헬동맹(G5 Sahel)을 출범시켰다. 사헬동맹은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차드 모리타니 등으로 결성돼 있다. 프랑스는 EU 및 세계은행과 협력해 이 지역 국가를 지원하고 있다. 부르키나파소와 니제르에서 원주민 약 40만명이 도움을 받았으며, 니제르에서는 900㎢ 이상 토지가 복구됐다.

황규득 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 교수는 국제사회의 지원이 일회성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사헬 지역이 테러의 온상으로 자리 잡는 것은 서방도 원치 않는다”며 “기후와 사회 불안정, 테러리즘은 다차원으로 연계돼 단편적 접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명오 기자 myung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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