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석은옥, 주님만 따라간 삶..그 어떤 절망과 역경에도 포기 하지 않았다.

유영대 2022. 9. 28.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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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우장학회(이사장 석은옥·사진)와 서정숙 국회의원은 다음 달 26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석은옥, 주님만 따라간 삶' (행복에너지) 출판기념회를 개최한다.

행사는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와 감사나눔 신문사가 후원한다.

석 이사장은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등으로 일한 고 강영우(1944∼2012) 박사를 내조하고 아들 안과전문의 폴 강, 크리스터포 강 변호사를 훌륭히 키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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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26일 국회 헌정기념관서 북 콘서트


강영우장학회(이사장 석은옥·사진)와 서정숙 국회의원은 다음 달 26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석은옥, 주님만 따라간 삶’ (행복에너지) 북 콘서트를 개최한다.

행사는 도서출판 행복에너지와 감사나눔 신문사가 후원한다.

석은옥 강영우장학회 이사장은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이자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위원(차관보급) 등으로 일한 고 강영우(1944∼2012) 박사를 내조했다.

아들 안과전문의 폴 강, 크리스터포 강 변호사를 훌륭히 키워냈다. 최근 큰 손녀가 예일대에 합격하는 등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교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등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으로 지역사회에 헌신하고 있다.


68세를 일기로 유명(幽明)을 달리한 석 이사장의 남편 강영우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그는 열네 살 때 눈을 다쳐 실명(失明) 했다.

공교롭게도 그 일을 전후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열일곱 살이던 누나가 어린 세 동생을 부양하느라 학교를 그만두고 봉제공장에 취직해 일하다 16개월 만에 과로로 쓰러져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결국 남은 3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강영우는 맹인재활원으로, 열세 살 됐던 남동생은 철물점 직원으로, 아홉 살의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가야 했다.

맹인재활원에 들어간 강영우는 기를 쓰고 공부해 1968년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뒤 연세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입시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맹인이 무슨 대학?”하는 당시 우리 사회의 편견이었다.

고 강영우 박사.


마침내 1972년 각고의 노력 끝에 단과대 차석으로 연세대를 졸업하고 한미재단과 국제로타리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멀쩡한 사람도 유학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용케도 1976년 피츠버그대에서 교육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강 박사는 1977년부터 1999년까지 22년 동안 미국 인디애나주 정부의 특수교육국장과 노스이스턴 일리노이대 특수교육학 교수 등으로 재직한 뒤 마침내 2001년 차관보급인 미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됐다.

말 그대로 ‘Impossible(불가능한)’이란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I’m possible(나는 할 수 있다)"로 바뀌듯이 그는 삶의 숱한 고비고비마다 그냥 점이 아니라 땀방울과 핏방울을 찍어 가며 삶의 길을 열어 갔던 것이다.

강 박사의 뒤에는 항상 아내 석은옥씨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강 박사가 다니던 맹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강 박사는 학생이었고 석씨는 그곳에 봉사 나온 여대생이었다. 강 박사는 누이 같은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고 결국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큰아들 폴(진석)은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 안과 교수로 일하면서 역대 미 대통령을 진료해 온 ‘워싱턴 안과의사연합’ 8인 멤버 중의 한 사람이자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의사 ‘수퍼 닥터’에 선정됐다.

둘째 크리스토퍼(진영)는 변호사로 미 민주당 원내총무실의 최연소 수석법률비서관을 거쳐 현재는 백악관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말이지 남부러울 것 없던 강 박사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졌다. 췌장암이었다.

길어야 두 달 정도밖에는 생명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는 지인에게 담담하게 이메일을 보냈다. 감사 편지였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종을 앞두고 두 아들에게도 편지를 썼다.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 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언제나 ‘나의 어둠을 밝혀 주는 촛불’이라 부르던 아내에게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은 마지막 연서를 전했다.

그는 자신을 지원했던 국제로타리 재단에 25만 달러를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생전에 “‘nowhere’란 단어에 스페이스바 한 번 치면 ‘now here’로 바뀐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어디에도 (돌파구가) 없다”는 말이 “지금 여기”로 바뀌듯이 그 어떤 절망과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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