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사회 공감의 시간이 왔다..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

2022. 9. 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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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공감의 시간이 왔다
송길원·청란교회 목사,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하이패밀리 대표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인이 있었다.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먹을 것 없는 엄마 젖꼭지에 젖도 마른다. 배고픈 아이의 울음이 커진다. 여인은 아이를 업고 동네 모퉁이 구멍가게를 찾는다. 애써 분유 한 통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간다. 주인이 ‘만 육천 원’이라고 하는 순간, 여인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펴 보는 손에는 구겨진 만원짜리 지폐가 달랑 있을 뿐이다. 힘없이 돌아선다.

여인을 지켜보던 주인은 남겨둔 분유통을 가져다 진열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분유통을 슬며시 건드려 떨어뜨린다. ‘퍽’ 하는 소리에 가게 문을 나서던 아이 엄마가 고개를 돌린다. 그때 주인이 말한다. “찌그러진 분유는 반값이면 됩니다.”

가게 주인은 만원을 건네받고 분유통과 함께 거스름돈 2000원을 거슬러 준다. 그는 8000원으로 스스로에게 천국을 선물한다. 이때 쓰는 말이 ‘우수’다. 우수(優秀)는 ‘빼어날 수’(秀)와 함께 ‘넉넉할 우’(優)다. 파자를 해보라. ‘사람 인(人)’ 변에 ‘근심(할) 우(憂)’자다. 다른 사람의 일을 걱정한다. 타인이 겪는 심리적 갈등, 외로움, 슬픔, 고통을 배려해주는 마음이다. 그는 참으로 우수하다.

제러미 리프킨에 따르면 인간은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즉 공감하는 인간이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다. 인류 사회가 남길 유산은 ‘공감의 문명’이다. 공감은 자연의 속성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다.

어떤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 칼로 자기의 손가락을 벤다. 감류계(檢流計)의 전극을 나무 껍질에 대어 본다. 전기 저항이 변화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나무는 사람 몸에 상처가 날 때 세포들이 파괴되고 있음을 느낀다. 식물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이다. 식물들조차도 고통을 지각한다는 의미다. 프랑스어 앙파티(empathie)는 파토스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어 파토스는 ‘고통’을 의미한다. 공감은 자연(nature)의 속성이다. 인간 본성(nature)도 그렇다. 둘 다 같은 ‘nature’다. 이를 거스릴 때 세상은 삭막해진다. 칼바람이 인다.

공감(共感)의 반대어가 반감이다. 적대적이다. 갈라치기를 한다. 적 아니면 내 편이다. 그러니 사회는 늘 불안과 긴장 속에 있다. 반감은 ‘과거시제’다. 과거의 경험이 나를 붙잡는다. 늘 퇴보만 있다. 당시 불행했던 감정 속에 갇혀 산다. 자신을 죄수로 만든다.

공감은 ‘미래시제’다. 그 초점이 과거가 아닌 나와 너의 미래에 있다. 상대방의 고통에서 내게도 언젠가 찾아올 수 있는 고통을 예감한다. 그래서 ‘미리 (다가)온 감정’이다. 그와 나는 다르지 않다. 동병상린(同病相燐)이다. 이때 상대방의 처지에 나를 이입(移入)하게 된다. 같이 아파한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난다. 이게 공감 사회다.

건물이 높아질수록 그림자도 길어진다. 대형마트들이 생겨나면서 골목 상권이 죽었다. 골목상권은 사회신경망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싱싱한 고기나 두부를 사기 위해 하루에 한 번은 가게를 들러야 했다. 시장만 보는 게 아니었다. 안부를 물었고 건강을 챙겨주었다. 며칠째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딸네 집에 갔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고독사가 적었다. 지금은 옆집에 사람이 죽어 썩은 냄새가 진동할 때까지도 모른다. 범죄 수사대가 들이닥치고 119가 부산을 떠는 사건을 통해서 알 뿐이다. 비정한 사회다.

서머싯 몸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의 세상이 왔다. 너무 멀어 닿을 수 없는 ‘달’은 말 그대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영국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인 ‘6펜스’는 척박한 현실의 상징이다. 달이 높아 보일수록 6펜스는 한없이 초라하다. 반감(反感)의 세상이다.

얼마 전 수원 세 모녀 사건이 말한다. 우리 사회는 고위험군 위기 가족이 널려 있다. 나홀로 유아 양육, 노숙 생활자, 알코올 중독자, 고독자, 언어장애와 생활 부적응의 다문화가족 등. 고립형 위기 가족들을 누가 돌볼 것인가. 복지 체계나 국가의 돌봄에는 한계가 있다. 이 빈자리를 메꿔 주어야 하는 것이 종교의 기능이다. 엊그제 나는 원불교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을 설파했다. 안타깝게도 그때 못했던 말이 하나 있다.

“말로만 하는 자비는 ‘무자비(無慈悲)’입니다. 사랑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게 가장 ‘대죄(大罪)’이고요. 이제라도 종교계가 나서 공감 사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종교계가 모든 이에게 달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하지만 6펜스의 삶에 달빛을 비출 수는 있다. ‘달빛 아래선 흑인 아이들도 푸른 빛이 된다’(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고 하지 않던가. 정부가 ‘종교다문화 비서관’ 직제를 ‘사회공감 비서관’으로 바꾼 이유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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