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돈 안 되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이게 나의 미소서식지

최창연 2022. 9. 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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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최창연의 원룸일기(6)

업무가 바쁜 날에는 “잠시만요”와 “괜찮으세요?” 같은 기계적인 말을 반복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런 날은 집으로 오면 허탈한 마음이 든다. 나는 내가 가장 뒷전이었구나. 가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잠시만요, 지금 괜찮으세요?”

돈을 받고 다니는 직장이 재밌기만 한 사람은 없다. 나름 힘든 이유가 있다. 병원에서 근무한 지 10년이 넘고, 많은 일이 견딜 만한 일이 되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아프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더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런데도 유난히 지치는 날이 있는데 괜찮을 줄 알았던 작은 것이 쌓여서 한꺼번에 몰려온다.

몇 해 전 우연히 김한민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했다가 ‘미소서식지(microhabitat)’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의 생물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을 갖춘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한데, 그것을 미소서식지라고 부르고, 야생의 생명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그런 미소서식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말이 유난히 마음에 와 닿았다.

북토크가 끝난 뒤 질의시간에 어떻게 하면 자신의 미소서식지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생계와 아무 관계 없고, 봉사활동도 아닌 일 하나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든, 잡지를 만드는 것이든, 거기에서 이상하게 틈이 생기고 바람이 들어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돈이 되지도 않고, 쓸 데도 없는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던 때라 ‘미소서식지’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 컸다. 그랬다. 그림은 나에게 어떤 서식지를 마련해 주는 일이었다. 일과의 대부분을 타인에게 맞추어 일하는 숨 쉬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공간, 가로 120m 식탁에서 스케치북을 열면 그 공간과 시간이 펼쳐진다.

[그림 최창연]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부터 나는 블로그를 만들어 꾸준히 그림일기를 올렸다. 우울하고 지친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저녁에 먹은 빵과 커피, 새로 산 신발, 눈앞에 보이는 창밖의 풍경,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까지, 주변에 있는 것을 주로 그렸다. 글로 쓴 일기는 아침이 되면 읽기 민망한 반면 그림일기는 달랐다. 눈앞의 대상에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던 혼잣말과 자기 비하의 감정이 사라지고, 내 상황을 조금 더 명료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쁜 기분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좋은 일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그리는 그림일기는 비례도, 색감도 엉망이었지만,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맑고 뿌듯한 기분이 남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스스로가 더 좋아졌다.

내가 만든 블로그의 이름은 ‘키친 테이블 드로잉’인데,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온 ‘키친 테이블 노블’에서 가져왔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란 식탁에 앉아 쓰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전문 작가가 아닌 일반인이 쓰는 소설을 일컫는다.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쓰이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처음 블로그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식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큰 두 번째 원룸으로 이사한 뒤 다리가 튼튼하고 널찍한 나무 식탁을 샀다. 보통은 밥을 먹는 생활의 공간이지만, 어둡고 지친 밤에는 이곳이 나의 미소서식지가 된다. 나는 스탠드를 밝히고, 스케치북을 펼친다. 부들부들한 원목의 촉감을 느끼면서, 튼튼한 식탁의 다리에 몸을 기대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같은 자리만 뱅뱅 돌아가던 일상에 틈이 생기고 바람이 들어온다. 그러고 나면 다음 날 맑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그 밤들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마땅히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림을 그릴 때 연필의 사각거림, 물통에 일렁이며 번지는 물감들, 스케치북의 단단한 매듭, 그리고 전보다 맑아진 나, 나는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방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나를 기다린다. 보통은 무엇이 되고 싶어서, 무엇이 갖고 싶어서 무언가를 한다. 살면서 챙겨야 할 의무와 관계도 많다. 그림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 주는 위안이 있다.

나는 이 서식지를 아주 오래 보존할 것이다.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기 때문에.

최창연 그림작가·물리치료사 puzzlet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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