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믿음세계'에서 살도록 돕는것이 성품교육의 핵심

2022. 9. 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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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교육을 받고 있는 네스트 기독교학교 초등학생들.


많은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명제 하나가 있다. “중세가 신앙의 시대라면, 근대는 철학의 시대이고, 현대는 심리 상담의 시대”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시대가 이렇게 바뀌어왔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주제를 좀 더 구분해보면 신앙은 영적인 문제이고, 철학은 인지적인 문제이며, 심리 상담은 정서의 문제이다. 이중에서 철학을 생각해보면 철학은 인지 즉 깨달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철학은 지친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우울증 약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정신병이라는 딱지 붙이기를 좋아하는 정신분석이나 인간의 감정에만 초점을 맞춘 심리 상담 대신 철학과 상담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면 인간 자신과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주장은 일종의 인지 치료다. 뭔가에 대한 깨달음이 그 사람을 치료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지적인 깨달음은 인간의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을 잠깐 자극하고 끝날 때가 많다. 어떤 학생이 컴퓨터 게임을 더 이상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게임이 공부에 방해가 되고 자신의 미래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 같은 깨달음 때문에 더 이상 게임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하루 이틀은 참을 수 있는데 삼일 째부터는 금단현상이 일어나서 견딜 수가 없다. 게임을 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깨달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더 큰 욕망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자 학생은 다시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또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이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이 학생의 힘으로는 중단할 수 없는 것이 게임이 갖고 있는 중독성이다.

그러므로 인지적인 깨달음은 변화를 위한 출발에 불과하며 인지적인 깨달음이 변화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에게 음란물의 문제점을 말해주고 보지 말라고 해도 보는 학생들이 많다. 이때는 ‘음란물이 내 미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인지적인 깨달음이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상태다. 인지적인 깨달음이 정보에 그치고 행동 개선으로까지는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음란물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고 대학입시에 큰 실패를 맛볼 때 비로소 음란물을 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래도 끊기 힘든 것이 게임, 음란물, 게으른 삶의 태도다. 이와 같이 인지적인 깨달음만으로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이 진실로 변화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인지적인 깨달음과 함께 경험적인 깨달음이 필요하고, 정말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서적인 두려움을 느껴야 하며, 다시는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자신의 의지를 동원하는 단계까지 가야 한다. 즉 인지, 정서, 의지가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잘못된 생각부터 바꿔야 된다는 것을 명시했다는 것에 철학의 공헌이 있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 중에서 ‘지(知)’에 대한 치료 즉 인지 치료의 한계를 살펴보았다면 다음으로 정서 치료의 한계를 생각해보자. 앞에서 말했다시피 중세가 신앙의 시대이고, 근대가 철학의 시대라면, 현대는 심리 상담의 시대다. 또 현대 심리 상담의 제일 큰 주제는 정서다. 인간의 정서에 모든 고통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인간의 고통의 기억이 정서에, 특히 무의식에 쌓이기 때문이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다. 어릴 때 부모에게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왜 그렇게 힘든지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문제가 어릴 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살 무렵에 아직 소변을 가리지 못해 바지에 소변을 봤는데 이것을 본 엄마가 무섭게 천둥이 치는 비오는 밤에 집 밖에 오래 동안 세워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상처가 되어 비오는 날이 너무 싫고, 늘 자신은 혼자라는 느낌이 들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현대의 심리 상담이 이런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왔고 앞으로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서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다. 이렇게 해서 건강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해도 정서 문제가 또 생길 수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또 심리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상처받는지 그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받는 상처는 대부분 부모 책임이다. 고집이 너무 세고 말을 안 듣는 아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에게 상처주지 않고 교육해야 될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 이 외에도 인생을 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멘탈이 거의 붕괴될 정도의 시련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도 현대의 심리 상담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만 불가항력적인 상처가 아니라면 상처를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상처를 다른 의미에서 보면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에고이즘(egoism) 또는 에고티즘(egotism)이라고 하는데 에고이즘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주의라면 에고티즘은 자신의 자아를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할 때 나오는 행동이다. 이것을 자존심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래서 자존심 때문에 상처받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다가 받는 고통이 적지 않게 있다. 이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마음 때문에 생기는 상처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또래 친구나 직장 동료 간에, 서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는 세상에서 유독 나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에고이즘이나 에고티즘에서 나온 생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에고이즘과 에고티즘의 전형적인 예는 가인의 후손 라멕이다. 라멕은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4:23)라고 말한다. 라멕은 자신이 받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고 자신이 받은 상함 때문에 소년을 죽였다. 라멕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라멕의 표현을 보자. “내 말, 나의 상처, 내가 사람을, 나의 상함.” 이렇게 ‘나’와 ‘내가’가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가인을 해친 사람에게 벌이 7배라면 자신을 해친 사람에게는 벌이 77배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라멕은 모든 일을 나 중심으로 보는 사람의 전형이다. 또한 라멕이 받은 상처와 상함을 히브리 원문으로 보면 단순한 타박상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자신의 자아가 위협받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 때문에 무자비하게 보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에고이즘과 에고티즘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나만…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쯤에서 예수님을 생각해봐야 한다. 세상에 예수님처럼 상처받은 분이 또 있을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것보다 더 큰 상처와 아픔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것이 예수님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내가 없는 사람에게는 상처는 처음부터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정서 치료가 중요하지만 정서 치료를 한 후에 인생의 목표를 내가 아닌 하나님과 타인을 위한 것으로 교정해주지 않으면 정서 치료를 받은 후에 또 다시 상처를 받고 “당신들은 왜 나를 위해 살지 않느냐?”고 말하는 에고이즘과 에고티즘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중세가 신앙의 시대라면, 근대는 철학의 시대이고, 현대는 심리 상담의 시대”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주장하는 인지적인 깨달음이 필요하고 심리 상담을 통한 정서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 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중세가 신앙의 시대였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세의 신앙이 올바른 신앙은 아니었지만 인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앙도 버리고, 깨달음도 버리고, 정서 치료에만 몰두하는 현대인들의 심리는 문제가 있다. 아프지 않고 상처 안 받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인지 치료와 정서 치료를 넘어선 신앙적인 매듭이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성경은 인지적인 깨달음을 주고 정서적인 위로도 주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강조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3:1-2이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이렇게 시편 기자는 자신의 상한 감정을 표현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입니다.”(시3:3)라고 고백한다.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편을 보면 상한 마음으로 시작한 기도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로 끝내는 것이 많다. 왜 그럴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 시편 기자들이 아픈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나만 생각하고 내 아픔만 생각하는 자의식에 붙들리지 않게 된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면 문제가 금방 해결되지 않으면 또 다시 흔들리게 된다. 믿음은 땅에서 하늘로 가는 것이다. 나라는 인간의 세계, 땅의 일에 대한 집착, 모든 일에 내가 아프고 내가 걱정되는 세계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하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상처는 나에 대한 집착이며 내가 죽을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면 하나님만 보이고 하나님의 일만 걱정된다. 그러면 그 순간 ‘내가 왜 이렇게 내 일을 걱정하지? 세상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이 이토록 큰데…’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나를 잊어버리는 것이 믿음의 세계다. 그러면 내 상처도 크지 않게 된다. 크게 보였던 것들이 아주 작게,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인다.

중요한 것은 나를 아름답게 쓰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 마음만 알면 상처가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지와 정서 치료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에서 살도록 해주는 것이 성경적인 성품교육이다.

◇필자 이해주 박사는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그룹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와 기독교교육학 박사를 취득했다. 석사논문은 '청소년의 성품교육을 위한 교육과정 개발'로 박사논문은 '기독가정에서 부모의 양육태도가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성품교육 전문가'이다. 현재는 씨앗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이해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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