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감상자 모두를 만찬자리로 잡아끄는 '놀라운 힘'

2022. 9. 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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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미술 산책]
황학만 작품 ‘마지막 유월절 만찬’ 2×1m. 2003년. 트리니티 신학대학원대학교 소장.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많은 크리스천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필자는 대한민국에서 크리스천 작품세계의 최고작가인 황학만 화백을 롯데월드 풀초롱밥상에 초대하여 ‘최후의 만찬’의 작품세계에 대해 듣게 되었다. 고희가 넘은 노작가의 깊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미술사적 작품해석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한국인의 우수한 문화 예술적 감각이 BTS, 아카데미상, 에미상을 통해 진가가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 우리 영화와 드라마가 이렇게 전 세계 시장의 주목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이가 많지 않았다. 필자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처럼 황학만 화백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 이 멀지 않은 미래에 주목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최후의 만찬> 하면 15세기 말 ‘다빈치(Leonardo da Vinci)’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은 이미 50년이나 앞서 ‘카스타뇨(Andrea del Castagno)’에 의해 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dajo)’와 ‘다빈치’에 의해 패러디되었음을 그들의 작품에서 말해주고 있다. 모든 예술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음으로써 독자나 관객들에게 일어나는 감흥을 타고 작가의 사상이 전이된다. 르네상스거장들의 <최후의 만찬>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최후의 만찬>들 가운데 유독 다빈치 작품만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만인의 사랑받는 까닭은 작품구성의 절묘함에 있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대속(代贖)의 역사적 정점에서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발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에 반응하는 제자들의 동작과 성품을 해부학적 연구를 거친 묘사와, 그 현장을 기하학적 원근법을 적용해서 완성한 것이 다빈치의 작품이다.

회화에 있어서 공간감의 극대화는 대각선구도에 있다. 그 중심에 소실점(消失點)이 있음을 알아낸 다빈치는 원근법의 대각선구도를 정확하게 적용해서 그 소실점에 정적에 싸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두고 좌우에 술렁이는 제자들을 배치함으로써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도록 구성했다. 그가 작품에 적용한 원근법은 오늘날까지도 조감도와 투시도에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사적인 의의 또한 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460×880cm. 산타 마리아 델레그라체 수도원 소장.


<최후의 만찬>의 성경적 의미는 대속(代贖)제물로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자신임을 밝히는 유월절(逾越節·Pascha)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구성은 구속사(救贖史)적 유월절을 제거하고 ‘스승과 제자의 배반’이라는 인간간의 갈등에 주목케 했다. 다빈치는 그에 더해 예수께로부터 사랑받던 ‘요한’을 여자로 묘사하여 억측을 유도했던 점에서, 그들에게 충일했던 르네상스정신이 여실히 반영되었음을 보게 된다.

앞서 제작된 ‘카스타뇨’와 ‘기를란다요’의 설정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리스도와 ‘가룟 유다’의 대립관계다. 특이한 점은 다섯 개의 사각형 벽면이 두 개의 창밖공간으로 변용되고, 다빈치에 와서는 세 개의 사각형 창으로 통합되었다는 변화다. 그에 더해 다빈치는 밝은 하늘을 그리스도의 얼굴 뒤에 배치함으로써 도식적인 후광을 효과적으로 걷어냈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의 시작점인 ‘해진 저녁’이라는 성경적 진실은 중요치 않았다.

앞선 두 작가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배경에 두고 ‘가룟 유다’를 마주 앉혀 마치 그가 스승인양 표현했으나, 다빈치는 인물을 모두 식탁 건너편에 배치해서 ‘가룟 유다’가 있던 자리에 관객이 놓이도록 구성했다. 그는 누군가 스승을 팔 것이라는 점을 앞세워 희화화함으로서 유월절 만찬의 진의를 제거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누가 ‘가룟 유다’고 누가 ‘베드로’인가하는 의구심을 촉발케 해서, 예수께서 밝히신 자신의 ‘살과 피’가 유월절 양식이요 영생의 음료임을 철저히 일소하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제작되고 19년이 지난 후에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과 함께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고, 또다시 19년이 흐른 시점에 요한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하나님 주권사상을 회복하고자 외친다.

그들은 르네상스정신이 충일했던 천재들이다. ‘재생’ ‘부흥’을 뜻하는 르네상스는 헬레니즘시대를 되살리려는 운동이었다는 점과 중세기독교가 허구였다는 자성에서 비롯된 인간성회복운동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이 최후의 만찬에 무엇을 담고자 했는지 수긍하게 된다.

개혁교회는 중세교회의 시녀역할을 충실히 했던 미술을 철저히 배격했다. 그럼에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만큼은 5세기가 지나도록 벽에 걸어놓고 찬사를 보내며 성장기를 보냈다. 이를테면, 유월절의 진의를 외면한 채 ‘가룟 유다’의 모델이 되었던 인물이 그 충격으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모델이 되었다는 예화가 수도 없이 복제되어왔던 것이다. 근래는 성찬 상을 덮는 보에 인쇄되어 아직도 그 정신이 건재함을 보이고 있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제작된 이후, 실로 5세기가 지난 2003년 마침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탄생되었다. 작품명에서 보듯이 작품을 마주하는 모든 이들을 구경꾼으로 내몰던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망령을 배격하고, 성경이 계시한대로 역사적 ‘마지막 유월절’임을 명확히 해서 감상자 모두를 참여자로 세우고자 한 작품이다. 2천 년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자리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있어야 할 현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베푸시는 영생의 ‘살과 피’, 곧 무교병(無酵餠)과 잔을 역사 속 현장과 관람객 사이에 놓음으로써 시대적 간극을 걷어낸 은총의 현장임을 인식토록 했다. 그리고는 이 잔과 떡을 받아 마실 것인가를 감상자들에게 묻는다. 이 잔을 외면할 때, 이 사건은 여전히 스승과 제자와의 갈등관계로 인식되어 누가 ‘가룟 유다’며 ‘요한’은 과연 여자였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황학만 화백은 한국과 캐나다, 이태리, 미국, 일본 등지에서 56회 개인전이 초대되었고, 〈갈보리의 묵상〉 〈황학만의 예수 전〉 〈가시면류관〉 〈제 6시의 묵상〉 〈골고다에 핀 나팔꽃〉 등 주로 성경메시지를 주제한 작품전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시대를 대표했던 화가 ‘렘브란트’를 연상케 한다. 14,5세기 서구를 뒤흔들었던 르네상스운동은 계몽주의와 종교개혁을 촉발케 한 요인이었다. 그 결과로 미술은 종교로부터 벗어났다고, 그 반면에 중세교회의 시녀 역에 충실했던 탓에 미술은 개혁교회로부터는 배척되었다. 계몽주의사조에 따라 예술은 인생을 위한 예술로 변모해가는 가운데 초기에 성경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담은 화가가 바로 ‘렘브란트’였던 것이다.

4세기가 흐른 오늘날에 그의 작품은 당대의 유산이 되었다. 그렇듯이 교회에서도, 세속에서도 외면당했던 성경주제의 미술은 맥이 끊긴 채 계몽주의시대를 넘어 오늘날 탈현대주의시대에 이르렀다. 종교개혁 이후로 순수미술의 이해가 전무한 현대교회의 배경에서 시대사조를 거스르는 그의 작업은, 동서양을 넘어 가히 독보적임에 렘브란트를 연상케 하는 것이다.

두 화가작품에 다른 점이 있다면, 렘브란트가 극명한 명암대비로 관람자를 성경이야기에 주목케 한 반면, 황학만 화백은 성경이 가르치고자 하는 구속사를 메타포로 해서 관람자를 그 진의 앞에 세우려 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보듯이 인본주의 사상의 대척점에 예술가로 홀로 서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기독교의 하나의 자산이며, 그의 작품 또한 후대에 남겨져야 할 기독교의 유산임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날의 미디어가 점점 자극적인 소재로 예수님의 생애를 왜곡하는 관점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한 황학만 화백은 오랜 성경연구와 기도를 통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라는 작품에 자신의 혼신을 불어 넣었다. 황학만 작가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는 우리가 믿음의 방관자가 아닌 떡과 잔을 받아들어 크리스천의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후배세대들에 대한 노작가의 부탁이 느껴졌다. 타인의 삶에 관심이 줄어들고 마음이 척박해 지는 이때 작품에서 느끼는 온화한 예수님의 미소가 우리 삶에 전해지길 소망해 본다.

◇필자 안노찬 대표는 미국제퍼슨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석사, 세종대학교 박사과정을 거쳐 현재는 한식명장으로 K-FOOD 한식세계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한식대가, (사)대한민국 K-FOOD포럼 제주연합회장, (사)한국프랜차이즈경영학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거상글로벌 대표로 '풀초롱밥상'과 '속초코다리냉면'을 경영하고 있다.

안노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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