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최악의 인간' 그린 이 영화, 한국에선 왜?
[김성호 기자]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포스터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세상 최악의 인간을 그린 영화가 있다. 노르웨이어로 'Verdens verste menneske', 영어제목은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다. 이 영화가 한국에 들어와서는 제목을 달리 달았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다.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최악이라 하였을까, 왜 유독 한국에선 누구가 아닌 모두를 최악이라 했을까. 궁금하여 들추어본다.
영화의 첫 장면,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자가 화면 정 중앙에 섰다. 그녀의 이름은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 분), 서른을 앞둔 젊음이다. 영화는 그녀의 삶을 내레이션을 곁들여 말한다. 늘 열심히 산 그녀는 의대에 진학했다. 이유는 입학점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녀가 높은 점수가 필요한 곳에 입학하는 것으로 제가 들인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율리에가 사랑한 남자들
영화는 율리에가 두 남자와 사귀는 모습을 집중해 그린다. 첫 남자는 악셀(안데스 다니엘슨 리 분)이다. 만화가인 그는 단행본을 여러 권 낸 자리 잡은 작가다. 율리에보다 열네 살이 많지만 사려 깊고 여유로운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율리에는 악셀의 집으로 들어가서 동거를 시작한다.
관계가 깊어지자 악셀은 율리에에게 제 친구들을 소개한다. 여유로운 교외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들이다. 부부 사이에는 애정이 있고, 뛰노는 자녀들 덕에 활기까지 돈다.
그러나 율리에는 좀처럼 어우러지지 못한다. 어딘지 불안해보이기까지 한다. 처음엔 안주인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애들과 좀 놀아주는 게 어떠냐"는 악셀의 말에도 틱틱대기 일쑤다. 대화는 어느새 아이를 갖느냐 마느냐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번진다. 그러나 갈등은 옆방에서 주인집 부부가 다투는 소리가 들려오자 단박에 풀어진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
ⓒ 그린나래미디어(주) |
가장 가까운 이에게 가장 상처를 입히는
작품을 발표하고, 영화화 제안이 들어오고, 공식석상에서 팬들과 만나는 악셀과 달리 율리에의 삶은 단조롭다. 그녀는 사진을 공부하고 서점에서 일하는 학생일 뿐이다. 어느 파티에서 악셀이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불안정하게 맴돈다. 율리에는 좀처럼 저 혼자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녀는 결국 파티자리를 떠나 악셀이 없는 또 다른 파티자리로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번째 남자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 분)를 만난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강한 끌림을 느낀다. 서로에게 애인이 있단 걸 알면서도 다가가길 멈출 수 없다. 마침내 그들은 이어지고 율리에는 악셀에게 이별을 고한다. "네가 뭘 망치고 있는지 아느냐"며 간곡히 붙잡는 악셀에게 그녀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나중에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을 돌릴 뿐이다. 그녀는 제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끝내 말하지 않는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도 깊은 상처를 입힌다. 영화는 특히 한 장면을 인상 깊게 잡아내는데, 율리에가 쓴 글을 에이빈드가 읽고 칭찬하는 대목에서다. 에이빈드가 글이 마음에 든다고 하자 율리에는 화색을 띄며 어느 대목이 좋았느냐 묻는다. 그러나 그가 글 자체가 아닌 글에서 드러난 율리에의 이야기를 좋아했음이 드러나자 그에게 인신공격을 퍼붓는다. "네가 문학을 알기는 하느냐"고 "50살이 넘어서까지 카페에서 커피나 나르지 않겠느냐"고 쏟아붓는다. 에이빈드는 그대로 무너진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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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을 피해 도망치는 인간, 당신은?
율리에에겐 분명한 결핍이 있다. 재혼한 율리에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를 찾은 율리에는 그의 무관심만을 확인할 뿐이다. 그는 율리에가 보낸 글은 읽을 생각도 않으면서 재혼해 새로 얻은 딸은 침을 튀겨가며 자랑한다. 돌아오는 길에 악셀이 "너만의 가족을 만들라"고 조언하지만 율리에에겐 그럴 의지도 여력도 없다.
기실 율리에는 누구보다 저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럴 수 없음만 깨닫는다. 그는 제가 쓴 소설을 감추고, 쓰레기라고 부르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다. 가족들에게 보낸 글이 읽히지 않았음을 알고서도 앞에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악셀의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먼스플레인'식으로 이야기해달라는 제안에 대해서도 우물쭈물하다가 어물쩍 넘길 뿐이다.
글을 내보이고, 아이를 갖고, 상대에게 솔직해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한 발 나아갈 수 있는 모든 순간에서 율리에는 도망치길 선택한다. 의학으로부터, 심리학으로부터 그랬듯이.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컷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원제의 분명한 메시지, 왜 다르게 번역했나
제 결핍으로 남을 상처 입히는 율리에를 향하여 영화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세상 최악의 인간'라고 분명히 말한다.
멈춰선 세상을 가로질러 제 사랑을 만나고 돌아온 그녀의 모습이 결코 아름답지만은 못한 건, 그녀가 상대는 물론 저 스스로에게도 끝내 솔직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내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며 피하던 그녀는 실은 누구보다 화목한 가정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산한 뒤 흘리는 눈물과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전 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럼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한국 제목은 의역이 아닌 오역에 가깝다. 영화는 명확히 율리에의 자기중심적이며 비겁한 선택들을 겨냥한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은 그저 희생되거나 온건하게 제 멋을 다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진다. 그로부터 우리는 세상 모두에게 각자의 밑바닥이 있지만 모두가 그 밑바닥을 드러내진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최악이 되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율리에가 만난 남자들이 최악이 아니었듯이.
영화는 원제대로 '세상 최악의 인간'이라고 하거나 '최악은 사랑할 때조차 최악이다' 정도의 제목을 달았어야 했다. 적어도 지금의 제목은 아니었어야 했다.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확히 반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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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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