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칼럼] 위기 때 권력의 진짜 실력이 나온다
국민 지지 얻고 국정 동력 생겨
[아시아경제 이정재 경제미디어스쿨원장 겸 논설고문] 위기를 다루는 게 권력의 실력이다. 잘 알려진 예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DJ는 "금고가 비었습디다"란 한마디로 위기를 실체화했다. 이게 국민의 위기 극복 DNA에 불을 붙였다. DJ의 선창에 따라 온 국민이 총력전, 재벌·노동을 개혁하고 1년 반 만에 위기 졸업 선언을 했다. 여세를 몰아 DJ는 숙원이던 평양 정상회담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했다. 위기를 제대로 소비하고 활용한 예다.
사실 당시 금고는 비지 않았다. 재정은 유례없이 튼튼했다. 외환 금고가 일시적으로 고갈됐을 뿐이다. 곳간은 든든한데, 현찰이 없었을 뿐이다. 경제통인 DJ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절묘한 수사(修辭)로 위기의 에너지를 국정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대통령의 언어는 이래야 한다. 전임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관료들에 둘러싸여 위기를 애써 외면하다 몰락한 것과 두고두고 대비되지 않나.
윤석열 정부는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면 후한 점수를 주기 어렵다. 지금 위기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다. 물가·금리·환율의 3고(高)에 전 정부의 퍼주기로 곳간은 진짜 비었다. 신냉전 시대와 공급망 붕괴, 위기의 방향도 여태까지 없던 곳에서 왔다. 작은 개방 경제인 한국은 더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위기를 제대로 알리고 강조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걱정없다"고 한다. 정부 관료들도 덩달아 "괜찮다"고 입을 모은다. 이래서야 위기를 다루는 실력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 정부는 왜 위기를 말하지 않나. 대통령실 관계자는 "경제는 심리다. 정부가 위기라고 말하면 진짜 위험해질 수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뒤집어보면 그만큼 경제가 어렵다는 뜻이다. 위기를 위기라고 말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실장을 지낸 변양균 대통령 경제고문은 "바른말 하기가 가장 어렵다. 경제가 안 좋다고 말하려면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대안을 함께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정부는 어느 쪽인가. 대안이 없나 자신이 없나, 아니면 둘 다인가. 그럴수록 위기를 말해야 한다. 적어도 세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위기설이 위기를 막는다. 한국민 특유의 국난 극복 DNA를 작동시킬 수 있다. 현재의 위기는 정부 혼자 힘으론 불가당이다. 정부, 기업, 가계가 똘똘 뭉쳐도 극복하기 쉽지 않다. "금고가 비었습디다"에 이어 국민을 한데 모을 제2의 절묘한 수사(修辭)가 필요하다.
둘째, 개혁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DJ의 노동·재벌 개혁은 외환위기 덕에 가능했다. 민노총과 거대 야당의 저항을 뚫고 연금·노동·교육·규제 개혁을 해내려면 "수술 없이는 죽는다"는 위기감이 필수다. 멀쩡하다면서 사람의 배를 가를 수는 없다. 위기가 개혁의 명분을 키운다는 건 상식 중 상식이다.
셋째, 밑져야 본전이다. 위기가 안 오거나 작게 오면 그걸로 족하다. 태풍 힌남노 때 그랬듯이 기껏해야 "괜한 호들갑" 정도의 비난만 감수하면 된다. 권력을 잃을 정도의 저항과 충격은 피할 수 있다.
반면 지금처럼 "위기가 아니다" "걱정말라"면 어찌 될까.
첫째, 자칫 전 정부의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형편 좋을 때 나라 곳간을 맘껏 털어썼다. 그 결과 지금은 곳간이 아니라 아예 쌀독이 비었다. 전임자의 잘못으로 가장 큰 위기 방패가 못쓰게 됐는데 "다 괜찮다"며 굳이 연대 책임을 질 이유가 있나.
둘째, 위기 극복이 어렵다. 정부가 괜찮다고 하면 가계와 기업이 방만해진다. 기름값이 올라도 전기를 아끼지 않는다. 공공재원을 아끼는 게 에너지 위기를 이기는 첫 출발점이다. 사소한 것이 쌓여 큰 힘이 된다. 경제 위기 극복도 마찬가지다.
셋째, 잘해야 본전이다. "태풍 안 온다"고 했다가 태풍이 오면 피해도, 비난도 커진다. 기상청이 왜 웬만하면 일단 "폭우" "태풍"이라고 예보하겠나. 국정 운영 실력이 기상청 일기 예보만큼은 돼야 되지 않겠나.
물론 위기를 말하는 것만으로 끝나선 안 된다. 다시 변양균의 말을 인용한다. "위기만 강조해선 안 된다. 희망도 말해야 한다. 대통령은 총괄 경제 사령탑이다. 고통 분담을 요구하되 그 결과물인 ‘승리와 희망’을 말해야 한다. 그게 비전이요 청사진이다." 그가 꼽은 비전은 ‘중산층 복원’이었다.
이정재 경제미디어스쿨원장 겸 논설고문 yijungja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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