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이지용의 부인이 혀 깨물린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친일 행위에 빠졌다가 가정사가 엉망이 된 친일파가 있다. 이완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과 함께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지용이 바로 그다. 이지용은 나라를 넘겨주는 친일행위로 일본의 환심을 샀지만, 이로 인해 부인 옥경의 인생 행보가 세상의 주목을 끄는 상황도 직면해야 했다.
원래는 홍씨였지만 나중에 이옥경이란 이름을 갖게 되고 이홍경으로도 불린 그의 부인은 남편과 함께 '한·일 우호협력'에 가담했다. 구한말 역사가 황현은 <매천야록> 제4권에서 이옥경이 한·일 양국 고위 관료의 부인들을 대거 모집해 부인회를 조직했다고 말한다. 일본공사관원인 하기와라 슈이치(萩原守一)나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 등의 배우자들이 이 부인회에 가담했다.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의 일이니, 이 행위 자체도 친일적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옥경은 일본 관리의 부인들과만 친해진 게 아니었다. 일본 남성들과도 가까워졌다. <매천야록>은 "지용의 처인 홍씨와 (민)영철의 처인 류씨는 매우 총명하고 고왔으며 장곡천(長谷川)과 손을 잡고 입술을 맞추며 아무 때나 출입하니 추한 소리가 나라 안에 떠들썩했다"고 말한다.
을사늑약 당시 한국주차(駐箚)군 사령관으로서 병력을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제2대 조선총독 재임 시절 무단통치를 펼치다가 3·1운동을 자초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와도 가까워졌던 것이다.
이옥경이 일본 침략자들과 교제한다는 소문은 그 뒤 <작설가>라는 유행가가 만들어지는 원인이 됐다. '혀를 깨무는 노래'가 퍼진 것은 이옥경과 하세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매천야록> 제5권은 "홍경은 처음에는 추원수일(萩原守一)과 사귀다가 국분상태랑(國分象太郞)과도 사귀더니 나중에는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와 사귀었다"라며 "수일(守一)은 분하고 질투가 났지만 드러내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암벽에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지용(이은용, 원안)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 강호광 |
남편은 도박으로 태형, 아내는 혀 깨물려
이지용은 사도세자의 5대손이자 고종 황제의 5촌 조카였다. 1870년에 태어난 이지용은 17세 때인 188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28세 때인 1898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됐다. 나랏일이 그의 집안일이었으므로 왕조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초고속 승진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지용의 관직 생활은 일본과도 인연이 깊었다. 문과 급제 2년 뒤 일본 시찰을 다녀왔고, 1901년과 1903년에는 주일전권공사로 임명됐다. 일본과 가까워질 기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알고 보면 이완용 못지않은, 어떻게 보면 한술 더 뜨는 친일파였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수월케 했다는 측면에서 이완용보다 한걸음 빨랐던 인물이다.
이완용은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이 여세를 몰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는 시점에 친일파로 변신했다. 종전까지 친미파·친러파였던 이완용은 을사늑약이 강요되는 1905년 11월에 친일파로 명확하게 변신했다. 이지용은 이완용보다 한걸음 앞서 있었다. 이지용은 을사늑약의 전초전인 1904년 한일의정서 강요 때도 친일파로 활약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면서 망국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 친일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외교권을 넘겨준 게 아니었다. 외교권을 넘겨주자는 주장을 해도 신변을 보장받을 만한 상황이 조성돼 있었기에 그들은 그렇게 한 것이다.
외교권을 넘기자는 목소리가 제기되기 전에 먼저 나온 주장이 있다. 유사시에 일본군의 한국 주둔을 허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를 관철한 것이 바로 한일의정서다. 1904년 2월 23일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는 대한제국이 안보 위기에 직면할 경우에 일본군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이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일본군의 한국 주둔이 가능해진 뒤에 친일파들이 외교권을 넘기자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일본군의 한국 주둔을 가능케 해서 을사늑약의 발판을 만든 장본인이 당시의 외교부 장관인 이지용이다. 한일의정서에는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함께 하야시 곤스케 특명전권공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지용의 친일은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외교 책임자라는 자리 때문에 강요와 협박을 받아 한일의정서에 서명한 게 아니었다. 그의 친일은 금전 욕심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상당부분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이 점은 <일한(日韓) 외교자료집성> 제5권에 수록된 하야시의 보고서에도 드러난다. '일한(日韓) 밀약의 예상 및 한국 조정의 회유 대체로 성공할 상황 등 보고의 건'이라는 제목이 붙은 1904년 1월 11일 자 문건은 외부대신 이지용이 '상황이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고 일본 측에 제보한 사실과 더불어 이지용에게 활동비 1만 원이 지급된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조선상고사>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가 1905년 <황성신문>에 입사할 당시의 논설위원 월급이 30원에서 40원 정도였다. 40원으로 계산하면, 이지용이 받은 1만 원은 논설위원 250명의 월급에 해당했다. 단순한 친일행위에 그치지 않고 매국행위로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일본군의 한국 주둔을 가능케 했으니, 사안의 비중을 놓고 보면 외교권을 넘긴 이완용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물질적 보상을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국권 침탈 뒤에 백작 작위를 받으면서 10만 원을 받았고, 1910~1912년 및 1925~1928년에 중추원 고문을 하면서 연봉 1600원에서 3000원을 받았다.
▲ 2010년에 발행된 위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귀속 대상으로 선정한 이지용 재산은 충남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 부동산 1필지다. 이 부동산의 2010년 당시 시가는 34만 5000원이었다. |
ⓒ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 |
'힘들게' 번 돈을 그는 의외로 가볍게 탕진했다. 이 점은 그의 중추원 고문 재임이 1912년에 끝났다가 1925년에 재개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그 13년간의 공백을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이지용은 친일 중독자인 동시에 도박 중독자였다. 역사학자 서영희가 집필을 담당한 <친일파 99인> 이지용 편은 "한일합병 이후에는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밤을 지샜다"라면서 "이지용이 소유하고 있던 한강변 언덕 위의 우람하게 솟은 앙옥집은 도박으로 날려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중부 사동(寺洞)의 자택은 완전히 도박장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도박장에 던져지는 돈은 매일 5, 6만 원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이지용은 11만 원을 한꺼번에 던지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나라 판 대가로 일본 백작이 되면서 10만 원을 받은 사람이 하룻밤 도박에 11만 원을 쓰곤 했다. 나라 판 돈을 하룻밤에 탕진하곤 했던 셈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1912년 12월 도박죄로 검거되어 2월에 태(笞) 100대를 선고받았고 3월에는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도박죄로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 13년간 중추원 연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태형을 100대 맞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도 왕성하게 활동을 한 것을 보면, 태형 집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일제 침략자들과 사귀다가 혀가 깨물리고 남편은 형식적으로나마 일제 관헌들에게 곤장 100대를 맞았으니, 친일의 결과로 이 부부가 얻은 것도 적지 않지만 잃은 것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지용의 백작 작위는 1928년 그의 사망 뒤에 손자에게 계승됐다. 백작 지위도 그렇게 계승됐다. 도박으로 많이 잃기도 했지만, 대한제국 황족이었던 데다가 일본제국 귀족이었기 때문에 죽기 전까지의 재산 축적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런 재산도 상속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2010년에 발행된 위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귀속 대상으로 선정한 이지용 재산은 충남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 부동산 1필지다. 이 부동산의 2010년 당시 시가는 34만 5000원이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