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 선진국'의 인쇄골목이 이래도 되나요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 인쇄골목 풍경 짐을 실어 나르는 3륜차 및 소형차 사이로 손수레를 끌고 가는 기술자 모습이 보이는 인쇄골목. |
ⓒ 이영천 |
▲ 주자소 터 조선 태종(1403) 때 세워진, 남산스퀘어 빌딩 앞 주자소가 있던 자리의 표석. |
ⓒ 서울 중구청 |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이자 신문사인 '박문국'이 일본의 도움을 받은 박영효 등 급진개화파 주도로 1883년 8월 설립되는데, 을지로 2가 부근에 있던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 동문학(同文學)의 부속시설이었다. 이곳 인쇄기로 그해 10월 창간된 한성순보가 발행된다. 박문국은 이듬해 갑신정변으로 기기 등이 파괴되어 폐지하였다가 1885년 다시 설치된다.
한편, 문명과 근대화에 뜻을 모은 유지들의 자본 출자로 근대식 인쇄시설을 갖춘 최초 민간인쇄소이자 출판사인 '광인사(廣印社)'가 1884년 3월 을지로 부근에 설립되어 1880년대 말까지 운영된다. 민간인쇄소 태동이다.
오랜 역사의 주자소와 교서관, 박문국과 광인사의 근대 인쇄 인프라를 기반으로 충무로에서 을지로로 이어지는 길고 좁은 골목은 각종 인쇄산업이 집중된 공간으로 변모해 나갔다. 이로 미루어 이곳이 6백여 년 우리 인쇄 산업 중심지였음을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인쇄술은 문자나 그림 등의 기호를 종이나 기타 물체의 표면에 옮겨 찍는 '복제 기술'이다.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인류에겐 혁명적 물품이었다. 생각과 역사적 사실, 재미있는 이야기 등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 왜곡이나 정보 독점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원화한 민주주의 맹아다.
우리는 인쇄 선진국이었다. 목판인쇄의 시작을 특정할 순 없지만,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 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금속활자 본 역시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 누구보다 문명의 길을 앞서 걷고 있었다.
위기와 몸부림
▲ 인쇄골목 군집을 이룬 인쇄골목 주요 가로 중 한곳. |
ⓒ 이영천 |
노력도 있었다.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인쇄인의 노력으로 옛 스카라 극장 터에 인쇄 앵커 시설(아파트형 공장)인 '아시아미디어타워'가 2009년에 세워진다. 이곳엔 현재 50여 업체가 입주해있다. 출판 시장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 자조하지만, 이곳을 비롯한 인쇄 업계는 지속 가능한 상품 특화를 모색하고 있다. 상품을 포장하는 패키징 인쇄, 다품종 소량 생산의 디지털 인쇄, 보안 인쇄, 전자 및 자기인쇄 등 첨단 기술을 도입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서울시도 화답했다. 2017년 인쇄산업 활성화 의도로 이 일대 30만 3000㎡를 '중구 인쇄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했다. 이는 앵커 시설의 설치·운영 및 건폐율과 용적률 완화 등의 하드웨어, 프로그램 기획·운영 및 경영자금 지원 등 소프트웨어를 망라하고 있다.
이에 서울 중구청은 '인쇄산업진흥계획'을 마련하여 앵커 시설 건립을 비롯한 공동구매·수주·협업 등 생산 체계 구축 등의 하드웨어와 정보공유·공동구매 및 공동작업 플랫폼, 경영 컨설팅, 인재 양성 등 소프트웨어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골목 안 좁은 골목에 적재된 짐과 차량, 통행하는 오토바이 등의 모습. |
ⓒ 이영천 |
이처럼 쇠퇴해 가는 인쇄골목에 최근 그나마 젊은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들어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등 노력도 뒤따른다. 작은 전시 및 공연은 물론 진양상가에 입주한 젊은 독립출판물작가와 인쇄업체가 협업체계를 구축하여 문을 연 '지붕 없는 인쇄소'가 대표적이다. 이런 몸부림과 싸움, 노력이 인쇄골목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되어줄까?
공간 복제
▲ 좁은 골목 밀집된 인쇄업소가 좁은 골목까지 차지한 모습. |
ⓒ 이영천 |
세운상가와 주변을 포함한 을지로 일대를 흔히 슬럼(slum)으로 바라본다. 슬럼은 철거를 통해 지워내야만 하는 물적대상으로 여기지만, 그게 아니다. 그 공간조직 안에는 삶과 역사가 살아 숨 쉰다. 따라서 고유 생태계를 온전하게 지켜내면서, 물리적 환경과 기반시설을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 훨씬 더 지혜로운 방법이다.기호화한 글자나 그림, 사진 등을 복제해 다중에게 좋은 정보와 이미지를 제공하는 '인쇄술'과 같은 원리다.
▲ 인쇄골목 손수레와 삼발이 등이 도열한 인쇄골목. |
ⓒ 이영천 |
좋은 공간은 건강한 도심 생산생태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수백 년의 숱한 사연과 애환을 담은 골목과 그 형상만이라도 건드리지 말고 오롯이 보전하는 지혜를 발휘할 순 없을까?
▲ 부분 재개발 인쇄골목 곳곳에서 중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재개발의 모습 중 하나. |
ⓒ 이영천 |
주자소와 교서관의 오랜 역사, 근대 인쇄의 서막을 열었던 박문국과 광인사. 을지로 인쇄골목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나 직지심체요절처럼 보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바라보자. 이를 지켜낼 지혜를 머리를 맞대어 짜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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