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감사의 번제

전병선 2022. 9. 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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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순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꽃 진 자리마다 신록이 밀고 나와 한가득 초록이다. 자연은 들여다볼수록 볼만한 책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딸의 결혼식을 워싱턴에서 치르게 되었다. 우리 부부를 마중 나온 사위는 이벤트를 준비하여 극진하게 맞아 주었다. 프러포즈를 하기 전 부모님의 결혼 허락을 받고 싶다는 구구절절한 편지와 간절한 전화 목소리를 자주 들어서일까.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딸의 숙소에 짐을 풀고 결혼식을 위해 준비해 온 물건들을 정리했다. 결혼식 장소는 시내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있는 호텔이었다. 나는 잠을 자려고 뒤척이다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깨었다.

선택이란 하나를 고르는 일이지만 하나를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한 남자를 선택하고 엄마의 품을 떠나려는 딸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어떻게 적용할까.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희생이 필요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사소하지만 결정해야 하는 문제들이 생길 것이고 그동안 누리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거나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의 순간들을 끌어안으며 잘 살아가길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사색의 그물을 걷어 내니 엄마의 손길이 최고라고 믿는 딸을 어떻게 꾸며야 할까 마음이 분주해졌다. 하얀 목련화 같은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마음속에 사랑을 가득 품어서 그럴까. 순수해 보이는 헤어스타일과 가벼운 화장에도 빛이 났다. 우리나라 웨딩업계의 정상에 있는 친구가 정성으로 만들어 준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 딸은 마치 선녀 같았다.

효성이 지극한 딸이 곁에서 살기를 소원했지만 삶이란 세심하게 봐야 하고 넓게도 봐야 한다. 떠나보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부부의 마음은 너무나도 허전했다. 남편은 나에게 당부했다. “여보, 우리 오늘은 눈물 보이지 맙시다.”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 부부는 한참을 흐느꼈다. 목메게 부르짖는 간절한 눈물의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딸에게 부탁할 말들은 편지로 써서 시댁 대표로는 시어머니가 친정 대표로는 내가 편지를 읽었다. 사위의 친구인 젊은 목사의 주례로 은혜 충만한 결혼식이 치러졌다. 피로연에 미국의 문화에 걸맞은 댄스파티도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오후에 우린 결혼식을 마치고 사돈 부부와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였다. 도로 양편으로는 밀림지대처럼 울창한 수목이 꽉 들어찬 산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새벽 2시부터 들러리들, 딸의 헤어 메이크업과 가족들을 꾸며 주느라 지쳤는지 졸음이 왔다. 그때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크게 출렁거리며 기우뚱했다. 자동차 앞면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돈어른은 비명을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서도 핸들을 잡은 그분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 멧돼지만 한 노루를 치었어요. 사돈, 놀라셨죠. 이래서 미국에서는 큰 차를 타야 합니다.” 자식의 결혼식 날이라 속으로 걱정하실 법도 한데 아주 좋은 일이라며 덕담을 했다. 꼬리를 물고 밀려오는 자동차들 앞에서 단 몇 초라도 차질이 있었다면 대형 사고를 당할 수 있는 아찔한 찰나였다. 도우시는 손길이 핸들을 잡고 행운을 주신 것이 분명하다. 내 몸의 피곤과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었을까요?”

“당연히 죽었지요. 미국에서는 산속 도로에서 종종 있는 일입니다.”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사가 느껴졌다. 네 사람 모두 머리카락 하나 상함이 없는 것은 기적이었다.

“노루 한 마리가 순결한 제물이 되어 주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사돈어른의 인격을 읽을 수 있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딸의 결혼식에 제물이 되어준 노루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교차한다. 우리 삶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생의 순간들이 있다. 위험을 축복으로 바꾸어 준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늘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사는 것 같은 현실이지만 오늘은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누군가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다.
곶감

찬 서리 내리는 가을
온 식구가 와상에 둘러앉아
감 깎으며 부르던 노래
신비한 가을
달콤한 곶감이 되려면
표면이 깎이고 진액 스미어
가을볕에 진종일 그을리고
찬 서리에 몸이 줄어든다

탱탱하던 자존심
강제로 깎아내리는 것
진한 단맛을 끌어내려는
찬란한 태양의 마음
고풍 나는 자줏빛으로
그대의 입속에 달콤한 곶감
감칠맛으로 달라붙는 가을
누가 내려 준 선물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불했는가

세모, 흩어진 핏줄 한자리에
오손도손 가족 사랑
곶감처럼 주름진 어머니 얼굴
구릿빛으로 익은 사랑 염치없어
고개 떨구고 모은 손
수천 년 지나도 갚을 길 없는
거저 받은 선물
창조주가 내려 주신 가을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A)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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