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허세 인플레이션

김초혜 2022. 9. 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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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은 오마카세, 주말엔 라운드, 휴가는 호캉스, 소소한 행복 대신 큰 행복이 당연해진 시대. '나는 이렇게 써도 되는 사람인가?'

대학생 시절,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보고 버킷 리스트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다. ‘영화에 나오는 근사한 저 호텔에 직접 가보고 싶어!’ 그곳은 도쿄 신주쿠에 있는 파크 하얏트 도쿄였다. 5평 남짓한 자취방에서 영화를 보다가 5성급 호텔에 가는 꿈을 꾼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취업을 했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그 꿈을 이뤘다. 호텔 52층에 있는 바에서 도쿄 야경을 내려다보며 위스키를 온더록스로 마셨다. 정작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하룻밤에 치른 비용 때문에 당분간 긴축 재정을 펼쳐야 했지만, 그 순간엔 다 잊고 나른하게 취했다. 돌아보면 그게 내 허세 인플레이션의 시작이었다.

‘허세 인플레이션’. 인기 유튜브 ‘부읽남(부동산 읽어주는 남자)’에서 나온 이 신조어는 처음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 가능하다. 실제로는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유해 보이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이 인플레이션처럼 급등하고 있다는 의미다. 김밥 한 줄에 4000원이 익숙해진 시대, 누군가는 가급적 집밥을 해 먹으며 돈을 아끼지만, 누군가는 파인다이닝에 가서 와인 페어링까지 즐긴다. 누군가는 저가 커피로 카페인을 보충하지만, 누군가는 호텔에 가서 최저 시급 10배에 달하는 망고 빙수를 먹으며 인증 샷을 찍는다. 문제는 돈을 아끼는 사람이나 돈을 펑펑 쓰는 사람이나 경제적 여건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돈이 없는 건 똑같지만 누군가는 자신의 체급에 맞는 소비를 하고, 누군가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최대한의 소비를 즐긴다. “이번 생에 내 집 마련은 글렀다”며 습관적으로 자조하는 30대 초반 청년의 손목에 1000만 원 가까이 하는 명품 시계가 채워진 광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몇 년 전에도 허세 인플레이션과 비슷한 개념이 대한민국을 휩쓴 적 있었다. 바로 ‘욜로(You Only Live Once)’족이다. 언뜻 보면 욜로와 허세 인플레이션은 비슷하다. 미래보다 현재를 중시하기에 지금 당장의 기분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러나 더 깊게 파고들면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욜로족이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중요해”라고 선언하며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한다면, 허세 인플레이션에 찌든 사람은 배낭여행보다 무리해서라도 명품 클러치백을 지르는 쪽이다. 전자는 ‘지금 당장의 내 행복’을 중시하고, 후자는 ‘남에게 보이는 행복한 내 모습’에 집착한다.

물론 경제적 여유를 충분히 갖춘 사람이 돈을 많이 쓰는 건 허세가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슈퍼카, #호캉스, #명품으로 재력을 과시하는 20~30대 중 일부는 실제로 그만한 자산을 갖췄을 가능성도 있다. 투자에 성공해 큰돈을 벌었거나, 이른 나이에 사업으로 성공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냥 타고난 금수저일 수도 있고. 하지만 어떤 사회, 어떤 시대든지 부자는 소수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여유로운 삶을 전시하는 사람 중 진짜 부자는 별로 없을 것이란 점은 우리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반짝거리는 삶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만 돈이 없나?’라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는 ‘그럼 나도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산적 사고를 한다. 하지만 ‘나도 저 정도는 누릴 수 있지 않을까?’라며 그들의 소비만 따라 하려는 사람도 많다. 허세 인플레이션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한 달에 300만 원을 버는 사람이 1인당 20만 원짜리 식사를 하는 건 정상인가? 물론 특별한 날 좋은 사람과 근사한 추억을 쌓기 위해 돈의 힘을 빌릴 수 있다. 두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가방을 할부로 사는 건? 살면서 가끔 자신에게 큰 선물을 선사할 필요도 있다. 문제는 이런 큰 소비가 어쩌다 한 번 누리는 이벤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큰돈을 쓸 때 뇌에서는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나온다. 기분을 좋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인간이 게임, 마약, 도박, 담배에 중독되는 이유는 도파민 때문이다. 의학계에서는 쇼핑 중독 역시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보고 적극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허세 인플레이션을 단순히 요즘 세대의 소비 패턴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왠지 찝찝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자신의 월급을 탈탈 털어가면서 도파민의 노예가 되는 걸까? 딱 떨어지는 정답은 없다. 가늠해 볼 뿐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우리는 뭘 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며 미래를 비관하고, 대신 지금 당장의 쾌감에 집중하기로 했을 것이다. 반면 누군가는 ‘미래?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막연한 낙관을 갖고 일단 오늘 기꺼이 지갑을 연다. 지나친 비관이나 근거 없는 낙관의 결말은 비슷하다.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거나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정말로 미래가 없다. 20~30대에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었을 땐 더 처절한 방식으로 본인이 미룬 것을 ‘꾸역꾸역’ 해야 한다.

이 거대한 허세 인플레이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호텔을 고르는 기준이 파크 하얏트 도쿄였던 내 경우를 말하자면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어느 날 문득 내 인생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지금 내 소득수준과 미래의 기대 소득,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생활비를 대략 계산했다. 지금 이대로 계속 살면 과연 20~30년 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나를 엄습한 것은 공포였다. 매일같이 지옥철을 타고 회사에 오가며 오랫동안 일해도 미래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할 때는 매달 월급을 받기 때문에 그 돈을 통해 생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언젠간 분명히 일을 중단하는 날이 온다. 아무리 인정받으며 다니는 회사라도 언젠간 반드시 떠날 날이 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태에서도 남은 삶이 꽤 길다는 점이다. 그날을 상상하니 아득했다. 5성급 호텔에 간 후 장소를 태그 걸어 인스타그램에 인증 샷을 올린 후 누가 하트가 눌렀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일단 스마트폰에서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차마 계정까지 삭제하진 못했다. 가끔 궁금하면 스마트폰이 아니라 컴퓨터 웹 브라우저를 통해 인스타그램에 접속해 볼 뿐이다. 겨우 앱 하나 지운다고 큰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를 통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자체가 줄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랑하고 싶어도 자랑할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지출’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온갖 인정욕구가 넘쳐나는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그렇기에 언제나 합리적 선택만 하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경제적 부분에서는 최대한 비합리성을 걷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부자가 아닌데 부자처럼 보이기 위해 더 가난해지는 선택을 하다 보면 결말은 배드 엔딩이다. 아무리 라이트급에서 챔피언을 차지한 권투 선수라고 할지라도 그저 그런 실력을 갖춘 헤비급 선수와 맞붙으면 곧바로 쓰러지는 것처럼. 소비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체급보다 몇 단계 높은 소비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반드시 쓰러진다. 기대수명마저 나날이 길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모아야 할 것은 인스타그램 하트 수가 아니다.

조성준 매일경제신문 기자, 〈예술가의 일〉 〈우울할 땐 돈 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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