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 몸값 ARM..한국은 왜 팹리스 불모지가 됐나
[한국경제TV 정재홍 기자·양현주 기자]
<앵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다음달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만나 삼성과 ARM의 전략적 협력을 논의합니다.
ARM은 `팹리스 위의 팹리스`라고 불릴 만큼 반도체 설계 기업의 대표주자로 꼽힙니다. ARM이 우리 반도체 산업에 갖는 의미가 무엇이길래 몸값을 100조 원까지 추정하는지 산업부 정재홍 기자와 짚어 보겠습니다.
정 기자. 이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ARM을 언급하면서 협력 논의가 급진전되는 모습입니다.
<기자> 네. 소프트뱅크 측에서도 손정의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의 만남에 대해 ARM 협력 가능성을 논의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의 인수합병(M&A)부터 지분 투자까지 여러 시나리오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미국 엔비디아가 우리돈 약 50조 원에 인수합병을 시도하다가 각국 독과점당국에 의해 무산된 만큼 직접적인 인수합병 보다는 인텔 등과 공동인수, 혹은 지분투자에 나설 가능성에 무게가 실립니다.
ARM은 엔비디아 인수가 무산된 뒤부터 삼성전자에게 가장 매력적인 인수합병 매물로 평가돼 온 게 사실입니다.
ARM은 모바일 AP 설계에 특화된 기업으로, 전세계 모바일 AP 90% 가량이 ARM의 기초 설계를 쓴다고 볼 수 있는데요. 과거 삼성전자도 `몽구스 프로젝트`라고 해서 ARM 설계 기술력을 넘기 위해 수 년동안 자체 모바일 AP 개발에 대규모 자금을 동원했지만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에 팀 자체를 해산한 적도 있습니다.
본래 가지지 못 한 게 가장 탐나기 마련이잖아요. 삼성전자도 매년 ARM에 2천억 원 이상 지적자산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ARM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전반이 가지지 못한 반도체 기초 설계 분야의 지적재산권(IP)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앵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팹리스, 즉 반도체 설계 기업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실태가 어떻길래 ARM을 이토록 환대하는 걸까요.
<기자> 메모리 반도체 산업 위주로 성장한 우리 산업 특성상 팹리스가 포함된 비메모리 분야는 항상 약점으로 꼽혀왔습니다.
시장이 더 큰 비메모리 시장까지 진출하자는 차원에서 삼성이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파운드리와 더불어 팹리스도 관심을 받은 거죠.
최근 들어 기술력을 인정 받아 사업을 키우는 중소 팹리스 기업도 나타나고 있고요. 독자 반도체 설계 역량을 키워나가는 애플, 아마존 처럼 대기업들도 반도체 설계 분야에 공격적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양현주 기자가 국내 팹리스 기업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양현주 기자> 올해로 창업 16년 차를 맞이한 실리콘마이터스. 디스플레이 전력을 효율적으로 제어하는 전력관리칩(PMIC)을 아시아 최초로 상용화한 국내 4위 팹리스입니다.
스마트폰 대중화 시기, 모바일 PMIC 기술에 집중한 덕에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를 비롯해 중국에서도 대형 고객사를 둬 연 매출 3천억 원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개별 기업이 원하는 맞춤 반도체 설계로 짧은 시간 내에 매출 성장이 가능했다는 설명입니다. 회사는 품목 다양화로 시스템반도체 종류가 2만 개가 넘어가는 지금이 새로운 사업 기회라고 강조합니다.
[허염 / 실리콘마이터스 회장 : 시스템 반도체는 분야가 워낙 다양해요. 센서류부터 시작해서 SoC, 또 저희 같은 파워 아날로그, RF 등 한 회사가 다 할 수 없어요. 그걸 팹리스 회사들이 한 분야들을 잘 정해서 기술 깊이를 확보하고 고객 확보하면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거죠.]
애플이나 아마존처럼 자체 반도체 설계 역량을 키워가는 국내 대기업도 있습니다. SK텔레콤에서 분사한 인공지능(AI) 반도체 회사 사피온이 대표적입니다.
엔비디아 등 외산 제품 의존을 피하기 위해 자체 반도체 설계 역량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최근 반도체 성능 대회에서 엔비디아의 제품보다 이미지 처리 능력이 2.4배나 되는 제품 경쟁력을 보여줘 업계를 깜짝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정무경 / 사피온 CTO : 성능 면에서 전력 대비 성능, 가격 대비 성능 면에서는 공정이 뒤처짐에도 불구하고 우수하다고 검증받았고. 기존 다른 기업들 특히 한국기업들이 받았던 R&D를 위한 거나 프로토타입 수준을 넘어서는 안정성을 검증받았다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
사피온은 SK하이닉스가 보유한 반도체 기술에 더해 SK 그룹사 역량으로 여러 자체 실험을 진행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2025년까지 매출 2조 원을 목표로 하는 사피온은 증시 상장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설계 역량을 높이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닙니다. 여전히 전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의 점유율은 1%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설계를 해도 생산할 파운드리가 없는 등 국내 팹리스 기업이 성장할 환경이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읍니다.
한국경제TV 양현주입니다.
<앵커> 우리 기업들도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서는 분위기인데요. 팹리스 기업들이 제대로 성장할 환경이 마련되진 않은 모양입니다.
<기자> 리포트에 나온 것처럼 우리나라 팹리스 세계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포함해도 3% 수준이고요. 두 기업을 제외하면 1%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통계를 좀 더 보면요. 지난해 연간 매출 약 1조 8천억 원을 넘긴 LX세미콘 같은 기업도 있지만요. 연간 매출 1천억 원을 넘긴 기업이 7곳 밖에 없습니다.
이에 전세계에서 팹리스 기업 순위 50위권 기업도 1곳 밖에 안 되는 실정입니다.
<앵커> 존재감이 미미하군요. 팹리스 육성에 더 시간이 걸리는 걸까요.
<기자> 시간도 필요하지만 팹리스-파운드리 생태계 조성이 먼저라는 지적입니다.
직접 팹리스 기업들을 만나며 들어보니까요. 대만과 다르게 국내에는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스템아이씨, DB하이텍 같은 대형 파운드리 기업들이 있지만 삼성과 SK는 주로 대량생산 물량을 취급합니다.
중소 팹리스의 물량은 많지 않아서 되레 대만 TSMC나 UMC 또는 중국에 파운드리를 맡겨야 합니다. 통상 설계를 맡겨서 시제품이 나오는 기간이 3개월 정도 됩니다. 파운드리 업체에서 예약이 밀려 있다고 하면 3개월을 넘어 더 긴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전문 인력도 중요한데요. 최근엔 반도체계약학과도 만들어지는 등 인력양성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석박사급 인재는 어느 기업이나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또 이런 인재들은 대기업에 주로 가기 때문에 중소 팹리스로 유입되는 효과도 적죠.
우리나라 팹리스 기업은 2009년에 200개 이상이었습니다. 정부가 파악한 기업은 현재 약 150개 정도로 추정되고요. 활동이 확인된 기업만 간추리면 125개 수준으로 10년만에 오히려 절반 가까이 줄었습니다.
삼성, SK가 수천억 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하거나, 정부와 함께 중소 팹리스 대회 등을 여러 시제품 생산 기회를 주고 있긴 합니다. 또 이른바 `K-칩스법`이라고 해서 첨단분야 중소기업의 경우 세액공제율을 현재 16%에서 30%까지 확대하는 법안도 발의돼 있는 상태지만 이해관계 갈등으로 법안이 통과되진 못 하고 있습니다.
<앵커> ARM과의 협력이 우리 팹리스를 포함한 비메모리 산업 생태계 조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기자> 들어보니 최근 중소팹리스 기업 경영진들의 가장 큰 고민은 추가 투자유치입니다. 경기 침체로 팹리스 투자 자금 자체가 줄고 있다는 전언인데, 스타트업들은 내년이 고비라고 합니다.
아직 삼성의 투자 방안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ARM과의 협력은 팹리스에 대한 관심을 재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이고요.
우리가 어느 기업을 인수하는 건 그 기업이 가진 인력, 지식재산권, 경험 등 유무형의 자산을 가진다는 의미잖습니까. 팹리스 불모지인 한국에 생태계 육성 효과를 불러 올 수 있다는 평가인데, 전문가 의견 직접 들어보시죠.
[이창한 /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삼성이 ARM을 인수하게 된다면 국내에 파장이 클 겁니다. 거기에서 가져오는 각종 지식재산권, 거기서 얻는 지식에 대한 경험, 나중에 직원들이 분사해나가면서 새로운 스타트업들이 만들어지고 고용인에게 지식이 전파되는 효과 이런것을 본다면 국내 지식생태계, 팹리스 생태계를 한 단 계 더 나아가 두 단계쯤은 오를 수 있는 효과가 있지 않나 조심스럽게 내다봅니다.]
ARM과 협력한 인재들이 국내에 배출되고, 경험을 전수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팹리스 불모지 한국에 단비와 같은 효과가 될 거라는 분석입니다.
<앵커> 네. 잘 들었습니다.
정재홍 기자·양현주 기자 jhjeong@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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