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자에도 '히잡 생트집' 대통령..거세지는 이란 반정부 시위
이란에서 일파만파 번지고 있는 '반(反) 히잡 시위'에 현지 당국이 인터넷 접속까지 끊으면서 무력·유혈 진압에 나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에브라힘 라이시(62) 이란 대통령이 미국 뉴욕에서 자신과 인터뷰가 예정된 CNN 소속 이란계 여성 기자에게 머리 스카프 착용을 강요하고 이것이 불발되자 인터뷰를 취소해 논란이 일고 있다.
22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라이시 대통령은 전날 뉴욕에서 CNN 앵커이자 국제전문기자인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와 인터뷰를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서 40분 지났을 무렵, 이란 측 인사는 아만푸어에게 라이시 대통령이 머리 스카프를 착용하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아만푸어가 이를 거절하자 라이시 대통령은 결국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이란 측 인사가 라이시의 의사를 전하면서 최근 이란 내에서 ‘반 히잡 시위’가 번지는 상황임을 암시했다고 아만푸어는 설명했다. 이란계 미국인인 아만푸어는 "이란 내에서 취재할 땐 현지 법률과 관습을 따르고자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지만, 그런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이란 외부에서 이란 관료와 만나기 위해 머리를 가릴 필요가 없다"며 "1995년 이후 (역대 이란 대통령) 한 명 한 명을 모두 인터뷰했지만, 이란 안이나 밖에서 머리 스카프를 쓰라는 요청을 받은 바 없었다"고 성토했다. 라이시 대통령의 요청이 이례적이고 도를 넘었다는 의미다.
CNN 여기자에게까지 불똥이 튄 이란의 반 히잡·반정부 시위는 수도 테헤란을 시작으로 50여 개 도시·지역으로 번지고 있다. 쿠르드족 인권단체 헹가우는 22일까지 미성년자 2명을 포함해 사망자가 최소 15명에 이르고 부상자도 733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 13일 히잡을 느슨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22세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경찰에 끌려간 뒤 16일 의문사하면서 이튿날 시위대가 몰리기 시작했다.
AP통신은 반정부 시위로까지 번진 이번 사태 배경에 강경 보수 성향의 라이시 대통령이 있다고 보도했다. 라이시 대통령은 재판관으로 재임하던 1980년대 후반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사형 집행의 배후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그 자신은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인권 단체들은 당시 처형된 사형수가 5000여 명에 이르고, 이들은 비석 없는 묘지에 집단 매장됐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에도 대규모 사형을 집행했다. 아랍뉴스에 따르면 라이시 정권은 지난해 8월 이후 1년 동안 최소 520명을 사형 집행했다. 통상 이란은 사형 집행 건수가 높은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2021년(366명)·2020년(255명)과 비교해도 훨씬 많은 수치다.
라이시 대통령은 여성들의 히잡 착용 규정에도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며 여성의 자유를 억압해왔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외국인을 포함해 외출 시 여성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했지만 온건파로 분류되는 전임자 하산 로하니 시절만 해도 히잡 착용 위반 관련 형 집행 수위가 다소 누그러진 분위기였다. 지난 2017년 이란 정부는 "복장 규정을 어긴 혐의로 더는 여성들을 체포하지 않겠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이시 집권 이후 지난달부턴 복장 규정을 어긴 길거리 여성들에 대해 풍속 단속 경찰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등 보다 엄격한 복장 단속에 나섰다. 현지 매체 이란 프라이머에 따르면 이란에서 복장 규정을 어긴 사람은 징역 2개월 등을 선고받을 수 있다.
때문에 풍속 단속 경찰의 고압적인 복장 단속에 억눌려있던 이란 여성들의 분노가 이번 시위를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 경찰은 아미니의 사망에 대한 책임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분노에 찬 여성들은 거리에서 히잡을 벗어 불태우고, 머리카락까지 가위로 잘라내는 중이다. 시민들은 아미니 의문사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한편 "독재자에게 죽음을"(death to the dictator)이라고 외치며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타라 세페리파 중동 및 북아프리카 담당 선임연구원은 CNN에 "풍속 단속 경찰에 한 번도 붙잡히지 않은 이란 여성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며 "아미니의 죽음을 계기로 여러 사고방식을 가진 이란인들이 권력에 맞서 결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인터넷부터 차단
이란 정부는 무력 대응에 나서고 있다. 현지 경찰은 수도 테헤란 등지에서 시위대를 향해 실탄·최루탄·물대포를 발사하고 1000여 명을 체포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경찰이 히잡 미착용 상태로 시위에 나선 여성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등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차량에 강제 연행시키거나 오토바이로 도망가는 여성을 위협적으로 쫓아가는 모습도 보인다.
현지 당국은 시위가 일어난 당일부터 테헤란과 아미니의 고향 쿠르디스탄주(州)를 포함한 이란 전역 곳곳의 인터넷 연결을 끊고 언론 통제에 나섰다. 통상 이란은 시위가 일어나면 인터넷을 먼저 차단하고 진압 수위를 높여왔다. 인터넷 감시단체 '넷블럭스'에 따르면 지난 21일부터는 메신저 왓츠앱과 인스타그램 등 모바일 애플리케이션도 차단된 상태다.
일각에선 지난 2019년 연료값 인상으로 촉발된 대규모 항의 시위와 같은 장기화를 우려하기도 한다. 당시 이란 당국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일주일간 인터넷을 선제 차단했다. 이후 이어진 이란 보안군의 강경 진압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 명이 부상했다.
바이든 "용감한 여성들 편"…이란 "내정 간섭"
미 정부는 이란 여성에 대한 학대와 폭력, 평화로운 시위에 나선 이란인의 권리 침해를 이유로 풍속 단속 경찰을 제재하기로 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21일 유엔총회에서 "기본권을 투쟁하는 이란의 용감한 여성들 편에 있다"며 서방 국가의 관심을 촉구했다.
반면 라이시 대통령은 뉴욕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피해 여성 아미니가 구타당하지 않았다는 검시 결과를 반복하면서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책임 있는 당사자가 있다면 반드시 조사해야 할 것"이라며 "유가족에게 이 사건을 확실하게 계속 조사하겠다고 약속했다"고도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 경찰관들의 민간인 살해 사례 등을 언급하며 "서방이 이란에 이중잣대를 들이대고 있다"고 되레 비난하기도 했다.
나세르 카나니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이란 내정에 개입했다"며 "이란 인권 문제를 정치화하고 대상화하는 데 아미니의 죽음을 이용하지 마라"고 경고했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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