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 시신 수습조차 불가능한 곳

서부원 입력 2022. 9. 2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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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과 저항 문화의 본향'인 대구 일일 답사기

[서부원 기자]

'대한민국 민주화가 광주에 빚졌다면, 대구는 항일투쟁과 저항 문화의 본향이다.'

수업 시간 아이들에게 입이 닳도록 강조하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현대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언명일지언정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광주를 빼놓을 수 없듯, 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맞선 저항의 역사에서 대구는 상징적인 도시다. 

저항 문화의 본향, 대구

교과서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만 꼽아도 대구와 연결되지 않는 게 드물 정도다. 서세동점 시기 동학이 배태된 곳이며, 국권 피탈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발화한 도시다. 대구의 3.1 운동이 전국적 확산에 기폭제가 됐고, 이곳에서 저항시인 이육사 등 숱한 청년들이 의열단에 가입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의 바람이 가장 거세게 불어닥친 곳 역시 대구다. 1925년 결성된 조선공산당 초대 비서 김재봉이 대구와 이웃한 안동 출신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방 후에도 대구는 사회주의의 본거지로서 색깔을 분명히 했다. 당시 대구의 별칭은 '조선의 모스크바'였다.

미군정이 실정을 거듭하던 1946년 10월, 식량 부족과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에 대한 반감이 폭발해 대규모 항쟁으로 번진 곳도 대구다. 대구는 미군정에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었다. 당시 미군정에 총살당한 항쟁의 지도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였다.

그로부터 4년 뒤, 6.25 전쟁 중 대구 인근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구 형무소의 수감자들과 1949년 이승만 정부가 만든 국민보도연맹의 가입자들을 이적 행위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집단 처형했다. 사회주의자라는 혐의를 덧씌운 채였다.

불의에 맞선 저항의 DNA는 면면히 이어졌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권력 연장 야욕에 맞서 맨 먼저 분연히 떨쳐 일어선 곳도 대구다. 1960년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유세에 참여를 방해하는 정부에 맞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당시 대구 고등학생들의 '2.28 민주운동'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져 끝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대구가 4.19 혁명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시지탄이지만, '2.28 민주운동'은 문재인 정권에 와서야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대구의 저항은 계속됐다. 유신 독재정권의 반인권적이고 폭압적인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이들 다수가 대구와 인근 지역 출신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유신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공산주의 폭력 혁명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씌워 처벌한 사건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관련자 중 8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고,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어 국제법학자 단체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33년이 지난 2007년에 열린 재심에서 당사자들은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곳이 다름 아닌 박정희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던 셈이다. 

"대구가 왜 저렇게 됐나요?"

수업 시간 대구의 '역사적 위상'을 부러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대구는 '보수의 본향'으로 인식된다. 몇몇은 아예 '꼰대들의 도시', '수구 꼴통의 고향', '일베의 천국'이라며 노골적인 혐오 표현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기성세대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대구의 자랑스러운 현대사를 설명하면, 아이들은 당최 믿으려 들지 않는다. 교과서에 버젓이 나오는 역사적 사실조차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한다. 수업이 마무리될 즈음이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렇게 반문한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가 바뀐 뒤 부쩍 질문이 늘었다.

"항일투쟁과 저항 문화의 본향이었다는 대구가 지금 왜 저렇게 됐나요?"

굳이 이유를 대자면 한둘 아닐 테지만, 답을 찾는 건 아이들의 몫으로 남겨두도록 한다.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역사 공부라고 믿기 때문이다. 시시콜콜 교사가 일러주면 아이들은 습관처럼 밑줄 긋고 암기한다. 그런 공부는 아무런 감동도 교훈도 주지 못한다. 

아이들이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돕는 게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 외 관련 도서와 영상을 추천하고 소감을 함께 나누는 걸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보는 답사는 가장 좋은 역사 공부법이다. 모름지기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조만간 아이들과 함께할 대구 답사를 떠올리며, 지난 주말 미리 대구의 현대사 유적을 돌아봤다. '보수의 본향'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 곳을 찾아다녔다. 경상도의 중심 도시였음을 증명하는 경상감영과 근대 문화거리,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 등을 부러 제외한 이유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관련 유적과 대구 10월 항쟁으로부터 6.25 전쟁 중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지, 그리고 유신 독재정권에 저항한 이들의 자취를 찾아가는 동선이다. 주제에 맞춤한 신암선열공원과 가창 댐, 경산 코발트 광산, 칠곡의 한 공원묘지 등을 차로 돌아보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대구 시내를 사방에서 포위하듯 자리하고 있다. 
 
 신암선열공원에서 내려다 본 대구 시내 전경. 산책로가 잘 갖춰진 시내 공원이었지만 단 한 명의 시민도 만날 수 없었다.
ⓒ 서부원
 
신암선열공원은 3.1 운동에 참여했거나 광복군에서 활동한 애국지사 52명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대구 시내에 산재해있던 묘소를 1987년 이곳으로 이장해 조성했다. 이후 국립묘지로 승격했으며, 개별 봉분의 크기나 면적으로는 여러 국립묘지 중에도 단연 으뜸이다.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터에 세워진 위령탑. 비석 면에 패여놓은 눈물방울 문양이 슬픔을 더한다.
ⓒ 서부원
 
가창 댐과 경산 코발트 광산은 해방 직후 좌우 대립과 전쟁으로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참혹한 현장이다. 1959년 댐이 건설되면서 시신 수습은 영원히 불가능해졌다. 수십 미터의 수직갱에 밀어 넣어 학살한 코발트 광산의 입구엔 '접근 금지'라는 안내판만이 탐방객을 맞는다. 
 
 수십 미터 수직갱에 밀어넣어 학살한 경산 코발트 광산의 입구.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누군가 놓아둔 종이컵 안에 눈물 같은 소주가 담겨 있었다.
ⓒ 서부원
 
칠곡의 한 공원묘지에 묻힌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의 묘소는 추모사업회에서 세운 빗돌이 아니라면 여느 무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다. 관리소의 별도 안내 없이는 찾기도 어려운 위치다. 기억하는 이가 적어서일까. 그중 하재완 열사의 유해는 지난 2007년 경기도의 이천 민주공원으로 옮겨갔다.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런데, 가는 곳마다 씁쓸한 공통점이 있었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가을의 주말이었는데도 단 한 명의 탐방객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위령탑이 세워진 민간인 학살지와 공원묘지는 말할 것도 없고,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신암선열공원조차 을씨년스러운 기운만 가득했다. 

외지인인 내게 현지인이 다가와 되레 그곳의 의미를 물어오기도 했다. 가창 댐의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은 아예 내비게이션에 나오지도 않고, 경산 코발트 광산의 위령탑도 최근에 비로소 탑재됐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가 가까운 공원묘지에 잠들어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시민들이 태반이었다. 
 
 칠곡의 한 공원묘지에 잠든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들의 무덤. 왼쪽부터 앞줄에 도예종 열사, 하재완 열사(이장), 여정남 열사가 잠들어 있고, 바로 뒤에 송상진 열사의 모둠이 보인다.
ⓒ 서부원
 
그도 그럴 것이, 대구 10월 항쟁과 국민보도연맹,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단어 자체를 생소해했다. 기성세대가 배운 교과서에서는 언급 자체가 없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재평가되고 위령 사업이 추진되는 마당에 시민들의 무관심이 못내 아쉽다. 
 
 대구 10월 항쟁과 6.25 전쟁 중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 뒷편으로 가창댐이 보인다. 1959년 댐을 조성한 건 민간인 학살을 감추기 위한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 서부원
 
'보수의 본향'이라는 반쪽짜리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항일투쟁과 저항 문화의 본향'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대구시민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중 외지의 아이들과 함께 대구를 찾았을 때, 대구에 대한 시민들의 역사적 자긍심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대구를 향한 조롱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대구시민들뿐이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뒤늦게 빠트린 곳이 떠올랐다. 대구 시내에 자리한 전태일의 옛집. 버스비를 아껴 자신보다 더 열악한 여자 시다공들에게 풀빵을 사서 건넨 아름다운 청년, 그도 대구 사람이다. 대구는 늘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고락을 함께해온 따뜻한 도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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