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남성들을 고기 분쇄기에".. 예비군 징집령 반발 타오른다

김표향 2022. 9. 22.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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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역서 반전 시위, 국외 탈출 행렬도
푸틴, 내부 반발 직면.. "스스로 지뢰 깔았다"
21일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 경찰이 예비군 동원령에 항의하는 시위 참가자를 체포하고 있다. 모스크바=A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예비군 30만 명 동원령을 내리자 러시아 전역이 분노로 끓어오르고 있다. 졸지에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 이들과 가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전쟁 반대” 구호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징집을 피해 국외로 도피하는 ‘엑소더스’ 행렬도 불어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기려고 내놓은 승부수가 도리어 사회 혼란과 국민적 저항을 부른 자충수가 된 셈이다. 억눌렸던 민심이 본격 분출하기 시작하면 푸틴 대통령이 유례없는 정치적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전국으로 번진 반전 시위… 남성들 국외 탈출도

21일(현지시간) 러시아 인권단체 ‘OVD 인포’에 따르면 이날 러시아 38개 도시에서 징집령 반대 시위가 벌어져 1,400명 가까이 체포됐다. 수도 모스크바에선 502명, 푸틴 대통령의 고향인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524명이 구금됐다. 시민들은 “푸틴을 참호로 보내라” “푸틴을 위해 죽을 수 없다” “우리 아이를 살려 달라”고 외쳤고, 경찰은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이후 전국 규모 시위가 일어난 건 7개월 만에 처음이다. 그만큼 징집령에 대한 공포와 반발심이 크다는 얘기다.

러시아 정부는 전쟁에 관한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러시아군을 비판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 여론을 강력히 통제해 왔다. 그러나 성난 민심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기세다. 징집령 반대 청원 운동에 하루 동안 30만 명이 서명했고, 러시아 인권단체 아고라에는 징집 관련 문의 전화가 6,000통 넘게 걸려 왔다. 검색 사이트에선 ‘팔 부러뜨리는 방법’ ‘징병 피하는 방법’ 등 병역 회피 법 검색도 급증했다.

푸틴 대통령의 정적인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수감 중 촬영한 영상 성명에서 “범죄적인 전쟁이 더 악화하고 있으며 푸틴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반전단체 ‘베스나’도 “우리 아버지, 형제, 남편인 수많은 러시아 남성들이 전쟁의 고기 분쇄기에 던져질 것”이라며 “대체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라고 규탄했다.

예비역 남성들은 국외 탈출에 나섰다. 러시아인이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으로 가는 항공편 좌석은 이미 동났고, 두바이행 티켓은 17만 루블(약 400만 원)로 가격이 8배 이상 뛰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핀란드, 몽골, 조지아 국경 검문소에도 육로로 러시아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최근 러시아인 입국을 금지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처럼 다른 국경도 언제 닫힐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소셜미디어에선 국경 상황과 출국 방법이 다급히 공유되고 있다.

21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한 시민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을 TV 화면으로 지켜보고 있다. 모스크바=EPA 연합뉴스

자충수 된 동원령… “푸틴 스스로 앞길에 지뢰 깔아”

러시아인들이 ‘패닉’에 빠진 건 그간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군사작전’으로 호도한 탓이다. 그래서 대다수 러시아인들은 국경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전쟁이 아닌 작전이라고 믿었기에 푸틴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기까지 했다. 그런 러시아인들에게 갑작스러운 동원령은 엄청난 배신감과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이제서야 자신들이 실제 전쟁에 참여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전쟁이 러시아인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고 촌평했다.

러시아 의회는 징집을 거부할 경우 탈영으로 간주해 최대 10년형에 처하는 법을 마련했다. 향후 총동원령과 전시체제 전환을 염두에 둔 조치로 풀이된다. 실제 총동원령이 내려질 경우 푸틴 대통령은 더 큰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서방의 제재에서 비롯된 경제난이 본격화하면 정치적 위기가 단지 위기로만 끝나진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미국 CNN방송 기고에서 “푸틴 대통령은 소파에 앉아 TV로 전쟁을 구경하면서도 참호로 가지 않으려는 러시아 중산층을 자극했다”며 “그는 스스로 자신의 앞길에 지뢰를 깔았다”고 진단했다.

당장 혼란을 수습하는 것도 과제다. 예비군을 훈련시켜서 전장에 투입하기까지는 최소 수개월이 걸리는데, 그 기간 민심을 충분히 달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하면 동원령을 발동한 명분도 힘을 잃는다. 내부 붕괴를 가속화하는 또다른 요인이다. 콜레스니코프 연구원은 “아직은 여론이 전쟁 장기화를 감내하는 분위기이지만 언제든 끝없는 긴장으로 인한 피로가 폭발해 분위기가 급변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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