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일 하늘이 열린듯 개천절 앞두고 다시 깨어난 1003개의 모니터

김희윤 2022. 9. 21.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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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 만에 재가동 된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의 대표작 '다다익선'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나는 TV 화면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정교하고, 파블로 피카소처럼 자유로우며, 오귀스트 르누아르처럼 다채롭고, 피에트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고, 잭슨 폴락처럼 격정적이고,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인 캔버스로 만들고 싶다."

TV화면을 화폭삼아 작품 활동을 펼쳤던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1932~2006)의 최대 규모 작품 ‘다다익선’이 4년여에 걸친 보존과 복원을 마치고 재가동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15일 다다익선 재가동과 함께 기념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 화면이 켜지자 지켜보는 관객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10월3일 개천절을 상징하는 1003대의 브라운관 모니터를 최대 지름 7.5m, 높이 18.5m 규모의 5층 철골구조로 설치한 다다익선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개최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개관에 맞춰 백남준이 제작한 기획작품이다.

다다익선은 앞서 2018년 3월 전면 복원작업을 위해 가동이 중단됐다. 브라운관 노후화에 따른 복원문제에 직면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전국 각지 고물상을 수소문해 600여 대의 브라운관 모니터 확보에 성공했다. 복원에 참여한 권인철 학예사는 "국내는 물론 중국을 비롯한 해외 중고 시장까지 뒤지며 브라운관 모니터를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이 중 41대가 이번 복원에 투입됐다.

과거 모니터를 전면 교체한 2003년과 지금의 수급상황은 천지차이였다. 수명이 정해진 모니터의 노후화와 더불어 누전과 화재위험도 문제였다. 이번 복원작업에서 6·10인치 브라운관 모니터 266대는 외형은 유지하되 화면은 평면 LCD 패널로 교체됐다. 백남준 생전에 작품 관리 전권을 위임받은 엔지니어 출신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가 이번 다다익선 보수·복원 작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작품의 철학은 영상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모니터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견을 밝힌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많을수록 좋지."

작품 제작 당시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원이 당초 투입되기로 한 300여 대의 CRT TV로는 구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이어진 백남준의 대답이었다. "그럼 천 대로 합시다." 결국 1003대의 모니터가 투입됐고 이 대화를 통해 작품 제목 ‘다다익선’이 탄생했다. 설치 당시 출시된 브라운관 TV 수명은 평균 8만 시간(1일 12시간 운용 기준 대략 18년)이었다. 건축가를 비롯한 주변인들이 8만 시간이 지나 모니터가 수명을 다하면 그땐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백남준은 "다 망가지면 그때 좋은 TV를 쓰면 되지"라고 답했다.

새로운 기술에 관한 열린 사고는 행위예술에 천착하던 그를 미디어아트로 이끌었다. 백남준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친은 태창방직 사장 백낙승, 조부는 조선 말 청나라 비단을 독점으로 국내에 유통했던 거부 백윤수로 엄혹한 시절에도 그는 재벌가 일원으로 남다른 성장기를 보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는 모친의 가르침은 그의 파격적 예술 행보와 더불어 거대한 작품 스케일에 잘 녹아들어 있다. 다다익선은 그런 작품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설치 초기에는 직원이 직접 테이프를 갈아줘야 했지만 현재 다다익선에 상영되는 8편의 영상 작품은 디지털로 변환돼 자동 재생되고 있다. 1003대의 모니터가 뿜어내는 열기를 감당하기 위한 냉각설비 개선작업도 복원의 주요 과정 중 하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3년의 복원기간에 만전을 기했지만 재가동 첫날 모니터 한 대가 꺼지는 ‘옥의 티’도 발견됐다. 교체와 수리를 거쳤음에도 노후한 각각의 모니터는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상황이다. 이에 미술관 측은 작품 가동 시간을 주 4일, 하루 2시간으로 제한하는 한편 수시로 작품 상태를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이 위태롭지만 위대한 작품의 보존과 복원 과정은 37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3개년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과정을 기록한 백서를 내년에 공개할 예정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예술과 기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전자표현방식인 기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시대를 앞서간 백남준의 지적은 그의 작품을 두고 조심스럽고 불완전한 재구성이란 숙제를 안은 현재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길잡이다. 다다익선 재가동과 함께 작품 관련 아카이브와 관계자 인터뷰로 구성된 기념 기획전 ‘다다익선: 즐거운 협연’ 또한 내년 2월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진행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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