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법원, 주 32시간 근무하다 숨진 증권사 직원 업무상 재해 인정

최석진 2022. 9. 2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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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 부정한 근로복지공단·법원 감정의 감정 결과 뒤집어
재판부 "업무시간에 관한 고용노동부 고시 과로 판단의 절대적 기준 아냐"
서울 양재동 서울행정법원./사진 제공=서울행정법원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법정근로시간인 주 40시간에 훨씬 못 미치는 주 30~32시간을 근무하다 숨진 증권사 직원에게 과로에 의한 업무상 재해를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과로 인정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근무시간과 망인의 흡연 습관 등을 이유로 근로복지공단(이하 공단)은 물론 법원 감정의도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판사가 규범적인 판단을 통해 결과를 뒤집은 이례적 사례다.

또 화이트칼라(정신노동자)에 속하는 증권사 직원의 업무 과중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공식적인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이뤄지는 상담 등 고객서비스를 고려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판결이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제7부(재판장 정상규 부장판사)는 사망한 A씨의 아내와 미성년 아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등 부지급처분 취소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원고들에 대해 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취소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서울의 한 증권사 지점에서 부지점장으로 근무하며 금융상품 매매, 상장법인 고객 관리 등 영업 업무를 담당했던 A씨(사망 당시 41세)는 2020년 10월 12일 오후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어지럼증과 구역질을 느껴 잠을 자던 중 경련과 구토를 동반한 오른쪽 팔다리 마비증세로 119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A씨는 뇌CT 촬영 결과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지주막하 뇌출혈이 발견돼 응급 코일색전술 등 시술을 받고 다소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지만 며칠 뒤부터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나기 시작했고, 결국 2020년 10월 19일 사망했다.

A씨의 유족들은 A씨의 사망이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로 인한 재해’라고 주장하며 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이 ▲A씨가 병원에 처음 입원한 날의 전날이 일요일로 휴무일이었고 ▲발병 전 1주일·4주·12주의 업무시간이 업무와 질병 사이의 관련성을 인정하는 기준에 못 미치고 ▲특별한 업무환경 변화가 확인되지 않고 ▲A씨에게 흡연 이력이 있는 점 등을 이유로 업무와 사망과의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한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판정내용 등을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자 소송을 냈다.

재판에서 유족들은 증권사 업무의 속성상 거래 실적에 따라 고객과 회사 양측에서 항의와 질책을 받을 가능성이 늘 존재하는데, 2020년 1월부터 6월까지 거래 실적이 거의 없어 1200원~1500원 정도의 성과급을 받던 A씨가 같은 해 7월부터 거래량이 폭주해 7월에 164만원, 8월에 282만원, 9월에 458만원, 10월에 399만원의 성과급을 받는 등 사망 전 4개월 동안 업무량이 크게 증가했음을 강조했다. 또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휴대전화로 고객들에게 전화 통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계속 증권거래 업무를 하다가 2차 뇌출혈이 발생한 만큼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A씨의 진료기록을 감정한 법원 감정의는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뇌혈관 질병 또는 심장질병의 과로 및 스트레스 인정기준에 따르면, 발병 1주일 이내의 업무량이나 시간이 발병 전 12주 간(발병 전 1주 제외) 1주 평균보다 30% 이상 증가돼야 하는데, A씨의 경우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데다가, A씨에게 흡연력이 있다는 이유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공단이 A씨의 근로계약서, 사무실 컴퓨터 전원의 ON/OFF 시간, 대중교통 출퇴근기록 등을 토대로 산정한 A씨의 근로시간은 주 1회 출장 4시간을 포함해 발병 전 1주일 간 평균 32시간 04분, 발병 전 4주간 평균 30시간 12분, 발병 전 12주간 평균 32시간 12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도, 적어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에 겹쳐서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인과관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우리 대법원은 “과로와 질병과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 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증명이 있다고 봐야 하며, 평소에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기초 질병이나 기존 질병이 직무의 과중 등이 원인이 돼 자연적인 진행 속도 이상으로 급격하게 악화된 때에도 그 증명이 있는 경우에 포함된다”는 입장이다.

재판부는 “A씨의 업무상 과로 및 스트레스가 뇌동맥류의 파열로 인한 뇌출혈의 발생 또는 악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되므로, A씨의 업무와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이와 다른 전제에서 이뤄진 공단의 처분은 위법하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공단이 산정한 A씨의 근무시간이 고용노동부 고시에 따른 과로 인정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A씨가 부지점장으로서 퇴근 후에도 수시로 전화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공단이 산정한 근로시간이 실제 근로시간을 정확하게 반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고용노동부 고시는 행정규칙으로서 대외적으로 국민과 법원을 구속하는 효력은 없고, 위 고시에서 정하고 있는 업무시간에 관한 기준은 업무상 과로 여부를 판단하는 데에서 하나의 고려요소일 뿐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될 수 없다”라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하며 “A씨는 발병 전 심한 정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상당한 양의 업무를 수행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동채 법무법인 아이앤에스 변호사는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망이 문제되는 사건에서는 보통 사망한 근로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 외 근로’를 했는지가 중요한 쟁점 중 하나로 다뤄지는데, 이번 사건은 법정근로시간에도 못 미치는 근무시간을 인정하고도 업무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판결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유족 측을 대리한 신현호 법무법인 해울 대표변호사는 “공단이나 감정의사들은 과로 등을 판단할 때 근무시간 등 계량화된 수치를 기준으로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블루칼라 노동자를 중심으로 업무상 질병을 인정하기 때문에 정신노동자들의 업무 과중에 대해서는 계량화된 기준으로 판단하면 과로나 스트레스를 인정할 사례가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사건은 40시간 내지 52시간보다 훨씬 짧은 근무시간이지만 공식적 근무시간 외의 고객서비스가 사실상 365일 24시간 내내 이뤄진다는 점을 인정한 판례”라며 “공단 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흡연, 음주만 하면 인과관계 단절로 몰아가는 데 대해 제동을 건 사례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또 신 변호사는 “감정인은 소송법상 법관의 보조자에 불과함에도 그동안 판사들이 감정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이번 사건은 재판부가 감정인의 자연과학적 판단 뿐 아니라 과로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규범적 판단을 배척하고, 규범적 판단의 주체로서 법원의 헌법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사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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