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교과서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한다"..계속되는 역사전쟁
2022 교육과정 한국사 시안 들여다보니
대한민국 교실에 한국사 통사는 없다
2019년 11월에 교육부 검정을 통과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경우 전체 5개 단원 가운데 4개 단원이 개항기 이후의 근·현대사에 할애되어 있다. 페이지 분량으로는 75% 정도다. 아직 역사라 하기엔 너무 가까운 시기인 2018년의 판문점 선언까지 사진과 함께 등장한다. 검정 교과서 9종이 대동소이하다. 반면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는 ‘전근대 한국사의 이해’라는 1개 단원으로 축약되어 있다. 이런 추세는 2022년 교과 개정으로 더 강화될 전망이다. 신유아 인천대 교수는 “이번 개정으로 근현대사의 분량은 84%로 늘어나게 될 전망”이라며 “150년의 역사에 84%를 할애하고 고조선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수천 년은 16% 분량에 몰아넣고서 한국사 교과서라 말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중·고교 역사 교사로 10여년간 재직한 경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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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현대사 분량 84%…“고대사 안 가르치고 동북공정 대항하라니”
6·25 남침뿐 아니라 3·1 운동과 임시정부도 시안에서 사라져
“대한민국 성취에 눈감고 현대사를 투쟁사·운동사로 그린 게 문제”
」
Q : 언제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났나.
A : “예전에는 근현대사가 선택과목으로 따로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통과목인 한국사의 분량 배분은 정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2012년 근현대사 선택과목이 폐지되면서 한국사의 근현대사 분량을 대폭 늘린 결과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선택과목이던 근현대사를 필수과목으로 바꾼 것이나 마찬가지다.”
Q : 현행 교과서 집필진은 전근대 부분은 중학교에서 다 배우니까 고교에서는 현대사에 집중해서 배우게 한다는 논리인데.
A : “중학생과 고교생의 지적 발달 수준이 다른데 같은 조선시대를 배워도 고교생에겐 더 심화된 것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대로라면 조선, 고려, 삼국시대 역사와 문화는 중학교때 배운 게 끝이다.”
Q : 실제 학교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나.
A : “고교생이 ‘태정태세문단세…’를 안 외운다. 대신 일제시대 역대 총독의 이름과 그 총독이 했던 말과 정책은 줄줄이 암기한다. 수능시험도 교과서 분량에 비례해 근현대사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전근대사가 축소된 결과 팔만대장경이나 금속활자(직지),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조차 9종 교과서 가운데 3∼4종에만 나온다. 기본 사실이야 중학교에서 배웠다 해도 고교에서는 보다 더 심층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닌가. 전체 9종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된 내용이 아니면 수능시험에도 낼 수 없다. 그러다보니 한국사 시험 문제 수준이 아주 이상해졌다.”
Q :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A : “서양 국가들의 교과서도 근대 이후가 분량이 많다는 반론이 있다는 걸 안다. 유럽 근대국가는 19세기에 탄생했기 때문에 그리스, 로마 등을 빼면 근대 이후를 많이 가르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고대로부터의 연속성이 있어 다르지 않나. 교실에서 고대사를 안 가르치는데 어떻게 중국 동북공정에 대응하란 말인가. 우리의 뿌리를 가르치지 않는 건 아주 교묘한 형태의 민족사 말살이다. 고대사나 왕조시대의 역사를 홀대하는 건 사회주의 국가에서 하는 일이다. 현대사를 강조하면 특정한 정치적 성향에 편중된 내용을 가르치기 용이해진다. 선거권 연령이 낮아져 현재 고3의 태반이 투표권을 갖는다.”
임시정부도, 3·1 운동도 사라졌다
현대사를 가르치지 말자는 게 아니다. 전근대사 교육의 수준이 현저히 침해받을 만큼 현대사 분량이 압도적으로 늘어난 게 문제란 얘기다. 뿐만 아니라 교과서 기술이 한쪽으로 편중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역사교과서의 좌(左)편향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지만 이번 시안이 그대로 확정되면 2025년 이후엔 더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앞서 언급한 대로 6·25 전쟁 부분에서 남침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2018년 교육과정에선 “남침으로 시작된 6·25”란 표현이 있었다. 물론 시안에서 빠졌지만 교과서 집필 과정에선 남침을 명기할 수도 있다. 교실에서 북침설에 동조하는 경우는 더더구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본 지침에 남침이 명기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이번 시안에서 사라진 건 남침뿐만이 아니다. 임시정부와 3·1 운동도 사라졌다. 작은 글자로 A4 용지 12쪽 분량을 채운 한국사 교육과정 시안의 어디에도 없다. 대신 “국내외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의 노선과 활동을 탐구한다”는 성취기준 항목을 마련해 놓고 “민족 운동이 다양한 이념과 노선에 따라 분화되는 동시에 협동 전선 운동의 흐름도 나타났음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해설해 놓았다. 3·1 운동과 임시정부가 교육과정 시안에서 사라진 것이 단순 실수일까. 이번 시안은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 교수는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시안을 분석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과거 교육과정에는 3·1 운동과 임시정부를 서술해야 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빠졌다”며 “3·1 운동이 임시정부로 이어지고 이를 계승한 게 대한민국인데 이렇게 되면 3·1 운동은 다양한 민족운동의 하나로 되고 결국 사회주의나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을 3·1 운동과 임시정부와 같은 반열에 놓고 역사 교과서에 포함시키려는 의미”라고 발표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 또한 독립운동사의 한쪽을 장식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합당한 비중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현행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땅히 가르쳐야 할 내용을 소홀히 해선 안된다. 시안에서 빠졌다고 교육 현장에서 3·1 운동을 건너뛰진 않겠지만 일련의 최근 추세나 경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교육부 당국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1 운동을 중시하지 않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북한의 역사기술과 상통한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북한 당국에 임시정부 100주년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공개 제안한 적이 있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활동에 정통성을 두는 북한이 절대 응하지 않을 제안이었다.
취재에 응한 학자·전문가들은 특정 사안에 대한 기술이나 용어 사용 등 세부적 내용도 문제지만 교과서를 관통하는 역사관이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수는 “동학, 의병, 무장독립투쟁,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등 민중 저항사를 축으로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민원 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은 “약소국에서 식민지를 거쳐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인 성취를 이룬 우리 역사를 너무 어둡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운동사 중심의 민중사관이 한국 교과서의 주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한제국사가 전공인 내가 보기에도 교과서의 근현대사 분량은 과잉”이라고 말했다.
검정제도가 도입된 이후부터 본격화된 역사 교과서 기술을 둘러싼 진영간 대립은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문제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지금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그 진영 대립에서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결과물이다.
역사 인식엔 정답이 있을 수 없고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미래 세대가 공부하는 교과서라면 우리 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담아 기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교과서를 놓고 치르는 소모전을 멈출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청소년 자녀를 둔 학부모께는 잠시 자녀의 책꽂이 속에서 역사 교과서를 꺼내 살펴보길 권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남긴 말이다. 오웰이 2022년의 한국에 환생한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교과서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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