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여러 번 막을 기회가 있었다

정효식 2022. 9. 2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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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식 사회1팀장

여러 차례 막을 기회는 있었다. 먼저 피해자 스스로 두 번이나 용기를 냈다. 첫 번째 고소는 2021년 10월 7일이었다. 2019년부터 지난해 10월 초까지 350여 차례나 스토킹한 것과 별도로 불법 촬영과 촬영물 이용 협박이란 성폭력처벌법상 중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전주환(31)을 고소했다. 스토킹처벌법 시행(2021년 10월 21일) 직전이었다.

경찰도 이땐 신속하게 움직였다. 이튿날 전주환을 긴급체포하고 검사를 통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피해자에 대해 한 달간 신변 보호조치도 취했다. 그런데 법원이 전주환의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앞서 관련 범죄인 정보통신망법상 음란물 유포죄로 벌금형을 받은 전력도 있었지만 풀어줬다.

풀려난 전주환은 “내 인생 망치고 싶느냐”며 합의를 종용하며 피해자를 20여 차례 추가로 스토킹했고 피해자는 올해 1월 27일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2차 고소를 했다. 이번엔 경찰이 앞서 영장 기각 경험 때문인지 구속영장 신청도, 스토킹처벌법상 한 달간 유치장에 유치할 수 있는 잠정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신당역 보복 살인’ 현장인 여자화장실 입구 추모공간에 지난 16일 한 시민이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연합뉴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회도 스토킹처벌법 제정 과정에서 막을 수 있었다. 2021년 3월 22일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스토킹 범죄를 ‘반의사불벌죄’(피해자 의사에 반해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로 한 정부 원안에 김도읍 의원은 당시 “이렇게 특례를 두면 피해자에 추가 위해를 가할 수 있다. 고소 취하하라는 둥, 처벌불원 의사 표시하라는 둥”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당시 이용구 법무부 차관은 “스토킹 정의 자체가 피해자 의사에 반해 접근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피해자 의사에 기초해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고 원안을 고수했다. 경찰청 송민헌 차장도 “처벌불원서 써 주면서 ‘다시 오지 마라’며 사적으로 해결할 필요성도 있다”고 거들었다. 국회는 “법 시행 후 문제가 있으면 그때 다시 개정논의를 하자”며 그대로 통과시켰다.

전주환은 ‘반의사불벌’ 조항을 근거로 합의를 종용하다가 실패하자 거꾸로 앙심을 품고 계획적인 보복 살인을 저질렀다. 우리 형법 체계의 독특한(?) 예외인 ‘친고죄’ ‘반의사불벌죄’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긴커녕 범죄자가 합의금으로 죄를 덮거나 합의를 안 해주면 2차 가해, 보복 범죄를 양산하는 독소가 됐다.

순천지청장을 지낸 김종민 변호사가 “신당역 보복 살인은 형사사법시스템의 총체적 실패이자 형사사법 정책의 실종”이라고 꼬집는 이유다. 좋은 법도 독소조항 하나로 무너질 수 있다. 법치의 실패다.

정효식 사회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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