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가 '반드시 살해해야 할 유형'으로 거론한 인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 |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교원 출신 친일파 중에 김극일(金極一)이라는 "극심한 충성을 바친 자"가 있었다. 극심한 충성을 바쳤다는 표현은 1949년에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나왔다.
'극심한 충성'이란 표현을 근거로 지극정성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 극악무도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맞다.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다뤘다는 의미에서 극심한 충성이란 표현이 나왔다. 어찌나 극악무도했는지, 상하이 임시정부가 '반드시 살해해야 할 일곱 유형'을 거론할 때 그의 이름이 예시됐다. 임시정부의 레드카드를 받을 정도로 극악무도했던 것이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1920년 2월 5일자 기사 중에 '칠가살(七可殺)'이 있다. 3·1운동 이듬해에 발행된 이 기사에서 임시정부는 ▲ 적괴(敵魁) ▲ 매국적(賣國賊) ▲ 창귀(倀鬼) ▲ 친일의 부호 ▲ 적의 관리된 자 ▲ 불량배 ▲ 모반자를 칠가살로 규정했다.
"혹은 고등 정탐 혹은 그냥 형사로 아(我) 독립운동의 비밀을 적에게 밀고하거나 아(我) 지사를 체포하며 동포를 구타하는 추류(醜類)들이니 선우갑, 김태석, 김극일과 갓흔 흉적이라."
고문왕 타이틀이 붙은 친일 경찰 김태석과 함께 창귀로 규정되면서 추한 부류로 언급됐다. 독립투사들의 눈에 김극일이 어떻게 비쳤는지 느낄 수 있다. 위 기사는 이 같은 사람들에게는 "반다시 즉시 복수를 하여야 할지니"라고 한 뒤 "천애지각(天涯地角) 어듸로 가더라도 사(死)의 저주를 도피치 못하도록 함이 애국자의 의무니라"라고 선언했다.
김극일 같은 친일파는 하늘 끝과 땅 모퉁이 어디로 가더라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 정도로 극악무도한 인물로 비쳐졌던 것이다.
임시정부의 경고장
김극일은 청일전쟁 4년 전인 1890년 4월 9일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했다. 열아홉 때인 1909년 3월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의 취명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
그의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권에 정리된 프로필에 따르면, 그는 1910년 2월 신의주경찰서 순사로 변신했다. 뒤이어 6월 24일 대한제국 경찰권이 박탈되고,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이와 함께, 그는 일본 순사보가 되고 다음 달에 순사가 됐다.
순사 계급이었던 1914년, 김극일은 문관시험에 합격했다. 그런 뒤 1916년에 두 계급 위인 경부(警部)로 승진했다. 경찰서 과장급이 된 것이다. 31세 때인 1921년에 경시로 승진했고, 그 후로 경남경찰부·부산경찰서·강원도경찰부에서 근무했다.
1927년, 그는 또 한 번 변신했다. 이번에는 일제 행정관료로 모습을 바꿨다. 이때부터 김화군수·양양군수·인제군수를 역임하다가 1931년 12월 11일 의원면직 형식으로 일제 공직에서 물러났다.
1920년 6월 24일자 <독립신문> 1면은 김극일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일신의 안전일망정 도(圖, 도모)하려거든 창귀 노릇을 그만둘지어다"라며 "너의 믿고 바라는 왜(倭)의 칼이 백이뇨 천이뇨"라고 경고했다.
그런 뒤 "다시 한번 혈루로써 충고하노니 이때에 단연히 퇴직할지어다"라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이 같은 '퇴직 권고'가 있은 지 7년 만에 경찰을 그만두고 군수가 됐다가, 군수가 된 지 4년 만에 공직을 떠난 것이다.
임시정부가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경고장을 보낸 것은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극심한 충성을 바치는 자'였다. 그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독립운동가 장지흥 살해 사건이다. 독립투사들을 체포해 실적을 올리는 일반적인 친일 경찰들과 차원이 달랐다는 점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다.
김극일의 잔혹한 본성
평양 출신인 장지흥은 3·1운동 뒤에 만주로 망명해 대한청년단연합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군자금 모집 분야에서 두각을 발휘했다.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스무 살 전후에 국내로 잠입해 '내지(內地) 자산가 제씨(諸氏)에게 고함'이란 문서를 부호들에게 배포하고 군자금을 거둔 뒤 영수증까지 발급해줬다. 연고가 있는 사람한테 자금을 부탁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국내 자산가 여러분'이란 표현으로 성명서까지 배포하면서 대담하게 자금을 모았다.
"1920년 겨울 한진산·문인곤 등과 함께 국내로 출장하여 활동하던 중 평북 경부 김극일을 만나 도강을 인도해준다는 꼬임에 빠져 안동현 진강산에서 암살되어 순국하였다. 사체가 압록강 얼음 속에 던져졌다고 한다."
경찰 신분을 숨기고 독립운동가들에게 접근해 도움을 제공할 듯이 해놓고 암살했다. 그런 뒤 압록강 얼음물 속에 시신을 던졌다. 독립투사를 붙잡아 재판에 넘기는 게 아니라 그냥 죽여버렸던 것이다. 동족들이 불과 1년 전에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목격해놓고도 독립운동가들을 비정하고 참혹하게 대했다.
김극일은 독립운동가 홍성익도 그런 식으로 대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전문이 소개된 1920년 2월 12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가 김극일의 잔혹한 본성을 설명한다.
이 공보에 따르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중병에 걸린 홍성익이 압록강 건너 안동현(지금의 단둥)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됐다. 이 첩보를 알아낸 김극일은 무장 병력 40여 명을 동원해 병원을 포위하고 홍성익을 체포했다. 이날이 1920년 1월 20일이다.
그런 뒤 김극일은 병원장 명의의 통지서를 조작해 환자 지인들을 병원으로 불러들였다. 이 전갈을 받고 달려간 임시정부 연락책 황대벽·김기준 등도 체포됐다. 안동현의 임시정부 연락망은 이로 인해 와해됐다.
병상에 있다가 끌려간 홍성익은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중환자라는 점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해 2월 5일자 <독립신문>에 따르면 그는 1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불법한 체포와 악형을 못 이기어 서거함이라"라고 <독립신문>은 전했다.
김극일은 공작 수사에 능했다. 또 그에게 체포된 독립운동가들 일부가 강물에 던져지거나 고문 중에 순국했다. 임시정부가 실명을 거론하면서 경고장을 보낼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 민족문제연구소 |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1949년 2월 서울 동숭동 자택에서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라고 한 뒤 "같은 해 8월 공소시효 기간 만료가 되기 이전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라며 "1950년 7월 6·25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라고 설명한다.
위 사전에 따르면, 반민특위는 "왜경의 원로 김극일", "일제에 극심한 충성을 바친 자"라는 표현으로 김극일을 평가했다. 이 같은 '극심한 충성'에 대해 일제는 안정적인 연봉으로 보답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1921년부터 1926년까지 경찰 간부로서 받은 연봉은 매년 1100~1600원이었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수령한 군수 연봉은 매년 1600~2150원이었다.
1945년 직전에 서울의 중급 가옥은 1000원이 안 됐다. 그 전부터 물가가 계속 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1920년대에 김극일이 일본에 충성하고 해마다 중급 가옥 1채 이상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이 귀속 대상 재산으로 지정한 것은 보잘것없다.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가 발행될 당시, 대한민국이 귀속 대상으로 지정한 김극일의 재산은 강원도 인제군 남면에 있는 시가 3755만 4000원어치 부동산에 불과했다. '극심한 충성'에 비하면 너무 극소한 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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