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원 '성범죄 감형 패키지'.. 재판장님 이게 현실입니다
[이준목 기자]
▲ KBS1 <시사직격>의 한 장면. |
ⓒ KBS1 |
성범죄 형량에 대한 논란은 최근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준영, 조주빈 등 주요 성범죄자들의 감형 소식은 대중의 공분을 샀다. 법원은 대체 왜 그들의 벌을 줄여주었나.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감형의 기술'이라도 있는 걸까. 그리고 가해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산산이 무너진 피해자들이 받을 두 번째 상처는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9월 16일 방송된 KBS1 시사고발프로그램 <시사직격>에서는 '존경하는 재판장님께-성범죄자의 반성문과 감형'편을 통하여 국내 사법부의 성범죄자 양형기준과 제도의 허점을 조명했다.
24세의 오하나(가명)씨는 지적장애 2급으로 초등생 수준의 정신연령을 가졌지만,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공공기관에 근무할 만큼 건강했다. 하지만 SNS에서 알게된 17세 김군에게 지난해 1월 성폭행을 당한 이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며 삶이 망가졌다.
검찰은 강간치상혐의로 가해자 김군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 군 사건을 소년부로 송치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소년보호재판에서는 소년원 2년 수용이 가장 무거운 처분이었고 전과 기록도 남지않는다. 만 17세였던 김군은 촉법소년 대상이 아니지만 판사 재량으로 형사와 소년부 재판을 선택할 수 있었다.
김군 측은 재판이 시작된 이후 수차례의 상담확인서와 소견서, 심리학적 평가보고서 등을 법원에 제출하며 죄를 뉘우치고 있다고 호소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인 것. 또한 김군은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야 여성가족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 등 여러 곳에서 상담을 받고 역시 확인서를 발급받았다. 해당 상담센터들은 확인서가 법원에 제출할 자료로 사용될 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김군은 재판중에는 자필 반성문도 제출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김군의 부모는 제작진의 방문을 받자 적반하장으로 "우리도 정신적으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양형자료를 제출한 것에 대하여 "왜 매스컴에서 개입하나. 우리가 판결했나. 법정에서 다 결론이 난 일을 가지고"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재판부는 양형 자료를 근거로 판결문에서 범행 당시 김군의 판단력이 떨어졌을 수 있고, 상담을 받는 등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는 이유로 소년부 송치 판결을 내렸다.
▲ KBS1 <시사직격>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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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재판에서 판사는 두 가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첫 번째는 범죄 사실이 증거를 통하여 입증되었는지의 유무죄 판단, 그리고 유죄라면 어느 정도의 형량을 내려야할지의 양형판단이 두 번째다. 그런데 이 양형판단에 대하여 우리 사회에는 오래전부터 깊은 불신이 자리잡았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국민 법의식 조사에 따르면 60.2%가 형량이 '매우 약하다,' 27.5%가 '약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양형 요소에는 피고인의 형사처벌 전력이나, 진지한 반성, 피해자와의 합의 등이 포함된다. 이 중 반성문은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 여부를 평가하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하여 '죄송합니다'라고 마감한 한 장의 문서가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약화시키는 근거로 인정되는 현실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가수 정준영은 집단 성폭행 및 성관계 불법 촬영과 음란물 유포로 유죄가 인정되었을 당시, 공소사실을 끝까지 부인했고 피해자와의 합의에도 실패했다. 그럼에도 진지한 반성을 한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감형받았다.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과 그 일당들도 반성문-봉사활동 확인서-장기기증 서약서 등을 제출하여 감형을 받았다.
지난 9월 14일 발생한 '신당역 여성 역무원 살인사건'에서 피해자는 가해자를 스토킹 혐의로 고소한 상태였고 범행 당일은 가해자에 대한 법원 선고일이었다. 가해자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취지의 반성문을 법원에 두 달치나 제출했지만, 그의 본심은 살인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 KBS1 <시사직격>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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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전문을 표방하는 한 로펌이 운영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무려 10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성범죄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재판 결과를 공유하는 게시판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 '끝내 살아돌아왔다'며 감형 성공사례를 공유하며 서로 축하를 해주고 있었다.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를 받았다는 한 회원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며 게시판에 자랑하기도 했다. 이어진 댓글에는 축하와 함께 어떤 양형자료를 제출했는지 질문이 쏟아졌다. 짙어진 연대감 속에서 죄의식이나 반성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감형을 위하여 헌혈증, 상장, 생활기록부, 장기기증서약서, 초음파 사진, 가족까지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거나 감성에 호소하는 온갖 수단들이 양형자료로 동원된다. 심지어 또다른 반성문 대필 사이트에서는 현직 변호사가 개발했다는 반성문 자동작성 프로그램을 통하여 문장 조합으로 최대 10만 개의 반성문을 만들어내는 데 드는 비용이 3만 원에 불과했다.
반성문, 탄원서, 심리상담서... 50만 원대 '감형 패키지 상품'
성범죄 가해자들이 반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쓰는 또다른 수법은 여성단체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지난 2021년 11월에 성범죄자가 양형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여성단체에 의도적으로 기부를 했던 사례가 밝혀지면서, 현재 대부분의 여성단체들은 성범죄자의 기부는 받지 않기로 합의했다. 성범죄자의 감형수단이 일종의 매뉴얼화되면서 우리 사회의 잘못된 문화로 확산될 가능성을 보여준 장면이다.
성범죄자 감형 컨설팅 업체에서는 아예 '감형 패키지 상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실제로 업체가 기획한 대로 법원에서 감형이 받아들여진 성공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50만 원대의 감형 패키지를 구매하면 반성문-탄원서에서 실제로 진행하지 않은 심리상담서나 자원봉사 후원 계획서까지 발급받을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무분별한 양형 자료의 진위 여부를 제대로 점검도 하지 않는 법원과, 이를 알고 악용하는 시장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리고 이는 "대한민국 법원과 양형 심리, 형사제도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에 가깝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회원을 거느린 커뮤니티나 유명한 로펌을 등에 업고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한 성범죄자들도 처벌을 받지 않는 악순환의 시장이 형성된다면, 피해자들이 느낄 상처와 박탈감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대검찰청이 제시한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 양형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반성문을 통하여 진지한 반성을 호소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약 6.5개월간의 형량차이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양형을 내릴 권한이 있는 판사에게만 보여주기식의 반성을 하고, 정작 피해자들에게는 반성의 의지가 와닿지 않는 가해자들에게 감형을 해주는 것이 재판부의 월권행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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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여자 화장실에서 불법 촬영을 시도하려던 의대생이 검거됐다. 피고인은 혐의를 전면부인하다가 판결 직전에서 여자 화장실에 실수로 들어갔다는 사실만 인정했고, 법원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는데 그 이유가 '자백하고 반성하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고인은 여전히 형이 과하다며 항소를 제기했고 불법촬영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여전하다. 피고인 역시 자원봉사 확인서 등을 법원에 양형자료로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은 피고인의 배경이나 환경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결을 내리는데 이는 자칫 형평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피고인이 일반인이 아니라 의대생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이유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가해자 위주의 '관대한 판결'
디지털성범죄 근절을 위한 시민 단체인 리셋은 '디지털성범죄 감형남발 중단 캠페인'을 펼치면서, 최근 법원이 내린 판결 중 황당하고 부적절한 '감형사유'들을 분석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중 1위가 젊은 나이에 공무원으로 신규채용되어 업무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2위는 27세의 대학원생이라는 것. 3위는 같은 범죄를 6개월 사이에 잇달아 저질렀음에도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 등이었다. 모두 피해자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철저히 가해자 위주의 시각에서만 관대한 판결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08~2018년 성범죄자로 신상이 등록된 이들 중 재범을 저지른 이들은 2901명, 여기서 앞선 사건 당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던 이들은 1201명으로 무려 41.4%에 이른다. 집행유예는 다시 재범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확인이 되었을 경우에만 유용한 형사적 제재다. 범죄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무죄나 다름없는 집행유예의 판결의 남발로 인하여 오히려 처벌의 효과가 발생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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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의 노인이 12세 초등생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해당 가해자는 이전에도 동종 범행 경력이 있었지만 당시 재판부는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고 전자발찌나 신상공개 처분도 내려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노인'이고 '경찰공무원' 출신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가해자는 지금도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가해자가 비슷한 범죄를 여러 차례 저지르고도 집행유예와 벌금 등으로 솜방망이 처분을 받은 것을 두고 '법원이 반성하지 않을 기회를 피고인에게 준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최근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는 '피고인의 나이'를 집행유예 참작사례 기준에서 삭제했다.
법무부 산하 디지털성범죄 대응 TF 및 전문위원회에서는 최근 '피해자의 목소리가 반영된 양형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법무부는 '피해자의 연령 및 피해의 결과와 정도, 피해 회복 여부,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 등 회복적 사법 및 피해자 관점의 요소가 명시되도록 개정할 것'을 추진하기로 했다.
앞서 성범죄 피해자였던 오하나씨에게 재판 과정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줬다. 오씨의 가족들은 담당 판사가 피해자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합의를 종용했고, 피해자 가족들의 진술도 저지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측이 정작 재판 절차에서 소외되었다는 박탈감은 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류영재 대구지방법원 판사는 "양형심리에 들어가면 피고인들은 자기 삶의 전부를 자료로 제출하게 된다. 피고인의 얼굴을 보고 반응도 접하고 피고인이 내는 자료들을 보면서 어느 정도 피고인을 이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그만큼 "재판에 피해자의 서사도 나타나야 된다. 안 나타는 게 문제고, 거기에는 법원의 책임이 당연히 있다"는 게 류 판사의 주장이다. 그녀는 "피해자 진술권이 헌법과 법률에서 보장된 게 언제인데, 굳이 알려주지 않고 기회를 부여하지도 않으니까 피해자는 내가 진술할 수 있는지도 모르다가 재판이 끝났다"며 대한민국 법원의 현실을 꼬집었다.
대한민국 형사사법절차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재판절차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제한되고, 피해자는 그런 상황을 마땅히 수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것이 과연 정의롭고 적법한 것일까.
유죄가 선고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사회와 피해자가 인식하는 엄중함과 크게 차이가 나는 양형판단은 사실상 오판과 다를 게 없다. 범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사법의 실패이며 자칫 사법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법적으로 보장된 피고인의 방어권은 존중하면서도, '피해자의 권리' 역시 보장하는 방향으로 양형 기준을 재설정하고 심리를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시대적 흐름이다. 범죄 정도에 합당한 처벌이 내려지고 재범을 막을 수 있도록, 피해자의 목소리가 법정 바깥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법이 정의구현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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