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은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음악방송 작가의 선곡표, 문득 이 노래]
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김혜원 기자]
이른 아침 눈을 뜨니 어제와는 다른 어떤 향기가 감지된다. 폐부를 최대한 열어젖힌 채 코를 킁킁 거리며 맡아본다. 익숙한 듯 낯선 향, 바로 가을내음이었다. 가을은 아침의 계절이다. 봄과 여름이면 낮 동안의 볕이 다른 계절보다 더욱 찬란하고, 겨울밤엔 겨울 특유의 이야기가 쌓이는 것처럼 '가을의 아침'은 다른 어느 계절의 아침보다 선명하고 뚜렷한 내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 이른 아침 눈을 뜨니 어제와는 다른 어떤 향기가 감지된다. |
ⓒ pixabay |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한다. 대체 언제부터가 가을이냐고. 심정적으로는 입추와 처서 절기도 지나 풀 벌레 소리가 공간을 울리며 밤 바람이 전에 없이 선득해지는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가을에 드는 것 아니겠냐고 대부분 추론할 것이다. 하지만 내겐 뚜렷한 가을의 경계를 밝히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볕이 제대로인 한낮임에도 찬물 샤워를 더 이상 하기 힘들어질 때, 그때부터가 바로 가을이다.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다소 우스울 수도 있는 이 기준은 워낙 덥기로 악명 높은 도시에 살아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도시에 사는 이들보다 조금 더 오래 찬물로 샤워를 해도 괜찮기에 말이다. 그 기분 좋은 차가움이 한 순간 소스라치는 소름을 돋게 하는 날, 그때부터를 가을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해서 내게 가을이란 계절은 더욱 각별하다. 무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일순에 일으켜 세워주는 힘을 가을로부터 전해받기 때문이다.
여름의 눅눅함 때문에 한껏 묵직해져 있는 목덜미를 건조하고 서늘하게 훑고 가는 바람 덕에 눈을 떠 창밖을 보면, 하룻밤 사이 몇 뼘쯤 깊어지고 푸르게 변한 하늘이 보인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데 한참 걸리던 여름과는 달리 눈이 떠짐과 동시에 몸의 세포들도 일시에 기립하는 가을 아침, 싸~한 공기에 실려온 페퍼민트향이 눈과 코를 자극하는 이 시간엔 두 말할 것도 없이 노래 '가을 아침'을 몇 번쯤 반복해서 들어야 하지 않겠나.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음
눈 비비며 빼꼼히 창밖을 내다보니
삼삼오오 아이들은 재잘대며 학교 가고
산책 갔다 오시는 아버지의 양손에는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수가 하나 가득 음
딸각딸각 아침 짓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엉금엉금 냉수 찾는 그 아들의 게으름이
상큼하고 깨끗한 아침의 향기와
구수하게 밥 뜸 드는 냄새가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파란 하늘 바라보며 커다란 숨을 쉬니
드높은 하늘처럼 내 마음 편해지네
텅 빈 하늘 언제 왔나 고추잠자리 하나가
잠 덜 깬 듯 엉성히 돌기만 비잉비잉 음
토닥토닥 빨래하는 어머니의 분주함과
동기동기 기타 치는 그 아들의 한가함이
심심하면 쳐대는 괘종시계 종소리와
시끄러운 조카들의 울음소리 어우러진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응석만 부렸던 내겐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기쁨이야
가을 아침 내겐 정말 커다란 행복이야
뜬구름 쫓았던 내겐
이른 아침 작은 새들 노랫소리 들려오면
언제나 그랬듯 아쉽게 잠을 깬다
창문 하나 햇살 가득 눈부시게 비쳐오고
서늘한 냉기에 재채기할까 말까 음/ 아이유 <가을 아침> 가사
이 노래는 대한민국 100대 명반으로 뽑힌 양희은의 아침이슬 20주년 기념 음반에 수록돼 있는 곡이다. 오롯이 가수의 목소리에 기대 서정성을 극점으로 끌어올리는 흔치 않은 곡이기도 하다. 사실 아이유가 이 곡을 커버하기 전까지 내 편협한 음악적 지식으로 이 노래만큼은 그 누가 불러도 원곡 가수인 '양희은'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혹여 비슷하게 부른다고 해도 양희은의 맑은 음색을 흉내 내는 데 그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한 오산이었다.
▲ <가을 아침>이 수록된 아이유 앨범. |
ⓒ 카카오엔터테인먼트 |
아이유의 2017년 리메이크 앨범을 통해 아이유 감성의 '가을 아침'을 들었을 때의 감흥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그 감정이 충격이었는지, 놀라움이었는지 판단할 사이도 없이 아이유는 어떻게 이런 오래전 풍경을 자신만의 목소리에 녹여내 원곡의 온기를 이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의문을 해소키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해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도저히 가능할 리 없다고 믿었던 '커버 곡'이 원곡의 골조를 전혀 무너뜨리지 않고 훌륭하게, 더해 단단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양희은의 원곡이 이른 아침 약수터에서 떠온 맑고 차가운 물을 닮아 있다면, 아이유의 그것은 마치 크림 브륄레(디저트의 일종)를 떠먹기 전의 기대와 긴장감을 담고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놀라운 맛과 멋을 지닌 그런 노래였다. 아마도 이에 원곡자인 양희은도 만족감을 표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커버의 정석을 따르면서 자신만의 색깔이 제대로 드러나 있어서 아이유 또래의 MZ세대는 이 노래를 의심도 없이 아이유의 노래라고 생각할 정도이니 말이다.
아이가 어느 날 이 노래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다가 진심으로 놀라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이 노래 원곡자가 양희은씨야? 엄마가 좋아하는 바로 그 가수?"
"그렇지. 그건 왜?"
"아니, 안 그래도 가사를 보면 우리세대의 감성은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아이유가 잘 불러서 잠시 아이유 노랜가 착각했어."
노래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 없이도 이렇게 시대를 단숨에 뛰어넘고, 각각의 다른 세대를 끈끈하게 결속시킨다. 다시 노래를 '리플레이' 해본다. 어쩌면 이렇게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이토록 소중하고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한다. 가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적한 시골마당에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비질하는 내가 된다. 또 부지런하게 소여물을 준비하는 소년의 미소를 담장 너머로 엿보는가 하면, 구수한 밥 냄새에 부엌을 기웃거리는 노총각 삼촌에 빙의하기도 한다. 한없이 평화롭고 한갓진, 그래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그 풍경, 바로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가을 아침이다.
노래도 진화한다. 걸맞은 환경에 적응하거나 청자들에 의해 차별적으로 선택되면서 더 듣기 좋게 변하는 것이다. 노래의 순혈주의를 고집하게 되면 그때부터 노래는 왠지 재미없어진다. 나아갈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새로고침과 변이와 혼합, 때로는 발전을 도모하는 파괴 위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하여 리메이크와 장르의 결합 같은 시도가 노래의 질료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유의 '가을 아침'은 이런 기반 위에서 무척 의미 있게 다가온다. 커버곡이면서, 또 무척이나 원곡의 소재를 잘 따르면서 무심히 자신의 색깔을 투명하게 입혀 놓은 영리함이 곳곳에서 보인다.
내내 괜찮았던 낮에 하는 찬물 샤워가 소름을 돋게 만드는 어느 하루엔, 이 노래를 부러 찾아서라도 들어볼 일이다. 노래라기보다는 서정시의 낭송에 가깝고, 목소리 하나로 그려낸 수채화 같은 노래에 잠시 취해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러도 좋겠다. 그러다 더 흥이 오르면 가볍게 발을 까닥거리며 계절의 변화에 젖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마침내 가을, 어느새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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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혜원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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