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이미 내연녀와 사는데.."이혼해라" 판결이 두렵다, 왜 [가족의 자격⑤]
■ 가족의 자격
「 가족의 자격을 새로이 법원에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연(緣)을 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원은 어떤 해답을 줄까요. 또 법의 공백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중앙일보가 새로운 가족의 자격을 묻습니다.
」
결혼한 지 20년쯤 지난 때부터 불륜을 시작한 남편은 내연녀 사이에서 아이까지 얻는다. 아내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고, 부부 간 다툼이 계속되자 남편은 아예 집을 나와 내연녀와 살림을 꾸린다. 대신 남편은 기존 자녀들의 학비를 부담하고, 100만원 정도의 생활비를 매달 보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나이가 들어 건강이 나빠진 남편이 자녀들에게 신장이식 이야기를 꺼냈다가 거절 당하는 일이 생기자, 남편은 다달이 보내던 생활비를 끊고 이혼까지 결심한다. 하지만 이미 60세가 넘은 데다 몸까지 안 좋은 아내는 결혼을 끝내고 싶지 않다.
남편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지난 2015년, 대법관들이 7:6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례다. 결론은 아내 승, 남편의 이혼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안 된다"라는 전통적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혼인 관계가 파탄에 이르게 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이른바 유책주의(有責主義) 판례다.
"내가 잘못했지만"…이혼할 자유
이혼은 크게 협의 이혼과 재판상 이혼으로 나뉜다. 협의 이혼이 80%에 이르긴 하지만, 기나긴 법적 다툼 끝에 갈라서는 부부들도 있다. 민법 제840조는 어떤 경우에 부부 중 한 사람이 법원에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지 열거하고 있다. 배우자가 불륜을 저질렀을 때, 배우자의 생사가 3년 이상 불분명할 때, 배우자의 가족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등이다.
이처럼 제840조 1호부터 5호까지는 상대방의 귀책사유를 적어놨다면, 6호는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을 때'로 규정한다. 불륜을 저지르는 등 잘못을 한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때는 대부분 이 '6호'를 근거로 한다.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떠나 이미 부부 관계가 파탄이 난 상황이니 우리 부부는 더 부부로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법원에 주장하는 것이다.
앞선 전원합의체 판결처럼, 우리 법원은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에만 이혼을 허용하는 '유책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유책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했다고 하더라도 혼인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이 분명하다면 법원이 이혼을 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미국과 영국·독일·프랑스 등이 이미 도입한 이른바 '파탄주의(破綻主義)'를 광범위하게 인정하자는 주장이다. 실생활에서 혼인 관계는 이미 파탄이 난 상황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법률상 혼인 관계에 묶어두는 것은 제재와 징벌의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급심에선 '파탄주의'의 견해를 받아들여,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받아들이는 판결들도 하나둘 나오고 있다. 법원이 배우자 일방의 책임을 따져 껍데기만 남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보다는, 이혼을 시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헌법상 행복추구권을 보장한다는 취지다.
"복수 아니에요"...이혼하지 않을 자유
그런데 이런 '파탄주의' 판결이 두려운 사람들도 있다. 바람 핀 배우자의 잘못을 용서하고 가정을 지키기로 마음을 다잡았는데 돌연 이혼을 당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복수'로 이혼을 안 하려는 게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A씨는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남편이 외부에 미혼 행세를 하는 등의 문제로 자주 다퉜다. 남편은 돌연 집을 나가 협의 이혼을 신청했지만, A씨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자고 남편을 설득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던 중, A씨는 남편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러자 남편은 다시 이혼하자며 A씨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혼인 관계가 A씨의 책임으로 파탄에 이르렀다고 보기 부족하고, 유책 배우자로 보이는 남편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사정이 없다"며 A씨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 판결은 2심에서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파탄이 난 데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이 있고, 이미 부부로서의 애정과 신뢰가 무너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며 이혼이 맞는다고 봤다.
아직 부부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 A씨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판결이었다. 두 사람이 자주 다투긴 했지만, 남편이 집을 나가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너무나 잘 지냈다는 것이다. "남편이 집을 나간 것도 우발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지, 불륜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고 했다.
A씨는 상고했다. "잘 살아 보기로 한 관계인데, 일방적으로 이혼 소송을 당하니 법원으로부터 제대로 된 판결을 받아보고 싶다"고 했다. "부부로서 함께 노력할 수 있는 기회도 제대로 얻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해결해보고 그때도 안되면 이혼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이혼 소송에서 재판부가 파탄이라고 판단하면 모두 파탄이 되지 않겠느냐"라고도 했다.
A씨와 같은 사람들은 또 있다. 자녀가 있는 부부의 경우 더 큰 변화를 맞는다. 불륜을 저질러 놓고 이혼을 원한 유책 배우자가 이혼 이후에 기존 자녀 양육비를 나 몰라라 한다든가, 아이를 데려간 유책 배우자가 이혼 후 자녀 면접교섭을 거부하는 경우 등이다. 이들의 상대 배우자들은 "거꾸로 책임이 없는 배우자와 아이들이 모든 피해를 감내하고 있다"고 호소한다. 비슷한 사정의 B씨는 "아이들을 위해 항소로 시간을 벌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처럼 법원이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늘어나지만, 상대방이나 자녀를 보호할 제도적 장치는 여전히 부족하다. 재산 분할이나 위자료에서 유책 사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양육비와 면접교섭 이행에 강제성을 두는 등 입법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김성기 변호사(풍경 법률사무소)는 "유책 배우자의 이혼할 자유가 부각되지만, 책임이 없는 상대방에겐 혼인을 유지할 자유도 있다"고 지적한다.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혼으로 인해 타격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실제로 2015년 전원합의체 판결 다수의견의 핵심 역시 이 부분이었다. 당시 다수의견은 "파탄주의로 이혼을 허용하는 나라들에서는 이혼 후 부양제도나 보상 급부 제도 등을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을 보호할 입법적인 조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현 단계에서 유책 배우자의 이혼청구를 널리 인정할 경우, 유책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희생되는 결과가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전원합의체는 ▶상대방 배우자도 혼인을 계속할 의사가 없거나, ▶상대방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뤄졌거나, ▶세월이 오래 지나 유책성이 점차 약화되는 등의 경우 등 예외적으로 유책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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