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 협박 반나절 뒤 "합의 가능?".. 스토킹 피해자가 떠안는 공포
[조혜지 기자]
▲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의자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
ⓒ 권우성 |
신당역 스토킹 살인범은 불법촬영과 스토킹 등 자신의 혐의에 대한 선고를 받기 하루 전날 살인을 저질렀다. 검찰은 최종 변론 기일에서 징역 9년을 구형했다. 드러난 바에 따르면 가해자는 재판 과정에서 끊임없이 합의를 시도했다. 피해자는 2년가량 스토킹을 당한 데 더해, 법원에 이르러서도 '합의 스토킹'에 시달린 셈이다.
스토킹 가해자들이 합의에 집착하는 이유는 지난해 3월 제정법으로 통과된 스토킹처벌법에 '반의사 불벌죄'가 적용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선 피해자를 '찾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신당역 살인사건 이후 이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나오는 이유다.
[법원] '합의 스토킹'에 "피해자 의사 반한 문자, 용서 위한 것"
2021년
12월 12일 : "합의서 써줄 수 있어?"
12월 13일 : "정말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줘라."
12월 14일 : "형사님이 스토커법 연루됐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라? 근데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었잖아."
자신 모르게 피해자가 오피스텔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꿨다고 오해, 얼굴을 10회 이상 가격해 입술을 찢고 전치 2주 상해를 입힌 가해자. 그는 교제 폭력 발생 다음날부터 합의를 요구했다. 폭행 범죄를 저지른지 반나절이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체포 당일인 11일 비속어와 함께 "밟아 죽였어야 하는 건데" 등의 메시지를 보냈던 태도와는 정반대의 읍소였다.
피해자가 폭행 당일부터 가해자의 연락을 계속 거부했음에도, 가해자는 발신자 표시 제한 전화는 물론 자신의 지인까지 동원해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했다. 전화와 메시지는 주로 새벽 1시께 쏟아졌다. 서울남부지법 제1형사부는 지난 6월 16일, 징역 8개월을 선고 받은 이 가해자의 원심을 파기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합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비록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용서를 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을 들었다. 앞서 가해자가 '합의 스토킹'으로 "불안감과 공포심을 일으켰다"고 언급한 대목과는 배치되는 판단이다.
▲ 16일 오전 서울 중구 신당역 여성화장실 입구에 스토킹 살인사건의 희생자인 여성 역무원을 추모하는 국화꽃과 시민들이 작성해 붙인 메모가 붙어 있다. |
ⓒ 권우성 |
국회는 어떨까. 반의사불벌 조항 삭제 법안은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발의한 안이 있다. 이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지난해 9월 상정됐으나 논의되지 못했다. 3개월 뒤인 지난해 12월 법안심사소위에서 다뤄지긴 했지만, 의원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추이를 본 뒤 다시 논의하자'는 결론이었다. 다만 법원행정처만이 "(스토킹처벌법) 입법 후 일본법을 확인하니 삭제했더라"면서 "언론보도를 봐도 반의사불벌죄를 하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꾸 압력을 넣는 수단이 된다는 지적도 있고, 그래서 삭제가 맞다는 의견이다"라면서 찬성 의견을 제시했다. 반대로 법무부는 "피해자의 의사가 다른 사건과 달리 존중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유지 의견을 냈다.
전문가들은 반의사불벌죄를 '피해자 권리 보장'으로 여기는 국회의 시각 자체가 스토킹 범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16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미국에서는 일부 스토킹의 경우 무조건 강제기소 하는데, (우리나라는) 피해자한테 (처벌 여부를) 던지면서 '네가 결정해'라는 식이다"라면서 "가해자는 피해자를 원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허 조사관은 "이번 신당역 사건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완벽하게 분리가 안됐고, (국가기관이) 재범 위험도를 측정하지 못해 살해 당했다"면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해야 가해자에게만 온정적인 독소조항을 거둬들일 건지 질문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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