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산 호랑이와 빨치산 대장의 악연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2. 9. 1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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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군 불갑산 나철기와 오병헌의 전쟁 이야기.. 빨치산 감옥은 실재했을까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나철기가 구금되었던 토굴(빨치산 감옥) 터
ⓒ 박만순
 
"끙" 변비가 있어서인지,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사기그릇 위에서 용을 쓰는 전남 목포 출신 젊은이는 변이 나오지 않아 이마에 심줄이 툭 튀어나왔다. 토굴에 있는 30여 명의 젊은이는 목포 청년이 변을 보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죽느냐 사느냐'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변 냄새가 무슨 대수겠나. 사실 며칠 전에도 나주 출신 젊은이가 끌려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 사이에 4~5명이 같은 일을 겪었다.

전남 함평군 불갑산 토굴에 갇힌 이들은 함평, 영광, 목포, 나주 등지의 우익단체 지도자이거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1950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빨치산에 의해 연행, 구금된 상태였다. 

"탕탕탕"하는 소리가 나자 나철기(1930년생·가명)는 벌떡 일어나 어둠을 응시했다. 이어지는 총소리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구금되어 있던 이들의 눈은 모두 토굴 입구로 향했다. 입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지금이야말로 탈출할 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5평(16.5㎡) 정도의 토굴은 높이가 1m에 불과해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들이 나무로 된 문에 달려들어 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나둘, 으쌰!" 사실 보초가 없는 토굴 문을 부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문이 부서지자 나철기 등 구금자들은 산 아래로 흩어졌다. 하지만 보름간 쪼그린 상태로 갇혀 있어 뛸 수 없었고 제대로 걷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나철기는 다리를 끌다시피하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나철기가 빨치산 감옥에서 탈출한 것은 대보름작전이 개시된 1951년 2월 20일 오전의 일이었다.

불갑산 호랑이, 빨치산 감옥에 갇히다

"철기, 고생 억수로 했는데, 집에서 쉬었다 오게." 해보지서장이 신문지에 쇠고기를 싸주며 말했다. "알았지라." 고개를 꾸벅 숙인 나철기는 두 달 만에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수복 직후 해보지서 유영하가 지서 보초를 서라고 한 이후 나철기는 한번도 집에 가지 못했다.

그런데 나철기는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집으로 직행하지 않았다. 자신이 해보면 문장지서에서 보초 선 것을 사람들이 알았기에 집에 가는 길에 빨치산을 만나면 해코지를 당할 것 같았다. 

결국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해보리 모산마을 지인 집으로 가 주인 아낙에게 쇠고기를 주며 "갈아입을 옷 좀 구해주소"라고 부탁했다. 구해 입은 새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집을 나설 때였다. "어이, 철기" "뭐시여?" 뒤돌아서는 순간 불이 번쩍했다. 정신을 차리니 사방이 컴컴했다. 잠시 후 어둠에 적응되자 주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습한 공간의 벽에는 통나무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그는 어림짐작으로 자신이 토굴에 갇혔음을 눈치챘다. 1951년 2월 5일의 일이다.

사실 나철기가 빨치산 감옥(?)에 갇힌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한국 전쟁 전 대한청년단에 가입한 그는 해보지서 의용경찰이 되어 보초를 섰다. 사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해보면과 대동면, 신광면에서 알아주는 '주먹잽이'였다. 12세에 아버지를 잃고, 그때부터 집안 농사일을 도맡아하던 그는 십대 중반부터 마을 어른들과 물꼬 싸움을 벌였다. 나철기의 증언이다.

"나는 16살밖에 안 먹었고. 근디 뭐이라고 하더니 뺨을 때려. 아!~ 그러니 맞고 생각하니까 부애가 나서. 요렇게 조금 밀킁게(미니까), 힘아리 없이 발캉 그냥 논둑으로 떨어지제. 워매 이거 암것도 아니구나!"

자신의 완력에 눈을 뜬 나철기는 그때부터 마을에서 위아래가 없었다. 틈만 나면 해보면 소재지에서 사람들과 드잡이했다. 경찰조차 그를 꺼렸다. 활동 반경도 신광면과 대동면으로 확대되었고 그는 '불갑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다가 해보지서 경찰 눈에 띄어 의용경찰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빨치산에게는 나철기가 눈엣가시였다. 용천사에 불갑지구사령부가 설치되고, 불갑산에 전남서북부 지역의 당조직과 피난민들이 모여들 때 나철기는 빨치산이 만든 토굴(감옥)에 구금됐다.

"새끼 죽이고 나만 살면 뭐 하겄냐"

천신만고 끝에 토굴에서 탈출한 나철기는 용천사 위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철기야, 함께 있다가는 전부 죽을 수 있승께, 흩어지자." 태청산으로 도망갔다가 3일 만에 돌아온 그는 망연자실했다. 국군 토벌 과정에서 어머니가 사망한 것이다. 

불갑산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정치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대보름작전 직전에 모두 불갑산으로 피난했다. 군인들이 좌익·우익 구분할 것 없이 중산간마을에 사는 주민들을 전부 학살했기 때문이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월까지 발생한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그런 경우였다. 그러니 '군인이 온다'는 소식에 함평뿐만 아니라 전남서북부 주민들이 대거 불갑산으로 피난을 갔다. 나철기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철기의 어머니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 아들(당시 13세)과 딸 두 명(당시 11세, 15세)을 돌봤다. 그런데 도망가는 와중에 장애인 아들이 군인에게 붙잡혔고 아들은 "엄마"를 외쳤다. 나철기 어머니는 "제 새끼 죽이고 나만 살면 뭐하겄냐"라며 아들을 따라갔다. 결국 큰 여동생은 목숨을 건졌지만 어머니와 두 동생은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던 나철기는 다시 한번 빨치산에게 붙잡히는 불운을 겪게 된다. 1951년 5월의 어느날. 함평군 나산면 원산리 잔칫집에서 술잔을 들이킨 나철기는 김치를 쭉 찢어 입에 넣었다. 지나가던 함평경찰서 사찰주임 강성기가 한마디 했다. "너~ 얼릉 몇 잔 먹고 가서 보초 서라."

눈을 흘긴 나철기는 청주를 연거푸 7~8잔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잔칫집에서 나와 모퉁이를 돌아 보리밭 가에 앉았다. 따스한 햇볕에다 술기운이 서서히 올라와 들고있던 칼빈 총구가 땅을 향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싸늘한 물체가 목에 닿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염투성이 산사람(빨치산)들이 씨익 웃었다. 산사람에게 묶여 인근 산 중턱으로 끌려간 나철기는 나무에 묶인 채 몽둥이 세 개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다.

몽둥이를 든 이는 함평군 대동면 출신 함평유격대장(함호대 사령관) 오병현((1921년생. 가명)이었다. 독한 매질에 나철기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자 오병현이 "이 새끼 갖다 묻어버려!"라고 지시했다. 나철기는 자기 무덤이 파헤쳐지는 것을 눈앞에서 바라만 봐야 했다. 

"야! 죽기 전에 오줌이나 시원하게 놓고 죽자." "그렇게 해라." 손을 풀어주는 산사람들 눈에 나철기의 미제 작업복이 들어왔다. "니 죽는 마당에 좋은 일 좀 해라." "뭣이여?" "니 옷 좀 벗어주고 가라." "그러지 뭐." 옷을 벗는 척하던 나철기는 순식간에 도망질을 했다. 뒤에서 총소리가 났지만, '걸음아 나 살려라'하며 뛰었다. 

악연은 이어지고
 
 불갑산 유해 발굴
ⓒ 진실화해위원회
 
그 일 이후 나철기는 빨치산 잡는 일에 혈안이 돼, 직접 붙잡은 경우만 4~5건에 달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던 나철기는 오병현을 붙잡아 총을 한 방 갈기지 않고는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떤 수상한 이가 함평군 대동면 강운리 복숭아밭에 은거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강성기와 긴급출동한 나철기는 어렵지 않게 오병현을 생포했다. 오병현은 배가 고파 복숭아를 따다 과수원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다. 나철기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에 강성기가 카빈총을 빼앗았다. "야, 이놈의 자식아. 이 놈을 살려 둬야 다른 놈을 잡지!"

전쟁통에 악연으로 엮인 두 사람은 58년 후인 2009년에 불갑산에서 다시 해후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때 불갑산에서 학살된 이들의 유해를 발굴하는 현장에서였다. 하지만 재회는 유쾌하지 않았다. 특히 나철기는 옛날 성질이 남아 오병현을 삽으로 내려치려 했고 옆에 있던 이들이 삽을 낚아채 가까스로 말릴 수 있었다. 

나철기가 증언한 '빨치산 감옥(?)'은 실재했을까? 빨치산 출신 김영승(1935년생)은 감옥의 존재를 완곡히 부정한다. 당시 군경의 공세가 계속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십 명이 구금되는 시설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빨치산 감옥이 없었다고 단언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전후에 경찰 정보원을 하거나 우익반동으로 찍힌 이들이 빨치산과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장성군 삼계면 발산리 오달근(1935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삼계면 발산리 서발마을 송윤식이 한국전쟁 전 경찰정보원을 하다가 빨치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북한군 점령 초기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자위대는 내촌마을(내산마을) 강씨 집안 수십 명을 처형했다. 경찰이었던 이가 6.25 전 좌익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경찰은 6.25 직후 남쪽으로 후퇴했고, 남은 가족들만 불법적으로 처형되었다. 어떤 명분으로도 그들의 죽음이 합리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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