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혼을 일깨운 '영화 아리랑'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

김삼웅 2022. 9. 1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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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ㆍ15해방 77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독립(운동)과 관련 미해결의 과제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1941년 12월 9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선포한 〈대일선전성명서〉(선전포고문) 원본과 1926년 청년 영화인 나운규가 제작하여 식민지 국민의 절대적 성원을 받으며 전국 구석구석에서 상영되었던 〈영화 아리랑〉의 필림을 찾지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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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 23] 국민을 하나로 묶고 뜻을 함께한 것은 〈아리랑〉이 처음이었다

[김삼웅 기자]

▲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포스터 나운규의 아리랑 영화포스터
ⓒ 김영조
 
8ㆍ15해방 77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독립(운동)과 관련 미해결의 과제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1941년 12월 9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 명의로 선포한 〈대일선전성명서〉(선전포고문) 원본과 1926년 청년 영화인 나운규가 제작하여 식민지 국민의 절대적 성원을 받으며 전국 구석구석에서 상영되었던 〈영화 아리랑〉의 필림을 찾지 못한 일이다.

〈대일선전성명서〉는 타이완의 사료관이나 미국 워싱턴의 사료관 어디에 있을 것이고, 아리랑의 필림은 일본의 어느 곳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해방 전후를 통해 한 편의 영화가 국민을 하나로 묶고 뜻을 함께한 것은 〈아리랑〉이 처음이었다. 또한 영화의 주제가인 구전민요 아리랑을 겨레의 노래로 그리고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애국가요로 격상시킨 노래가 되었다. 
 
▲ <아리랑> 제작 기념 사진. 앞줄 중절모 쓴 이가 주인규 그 왼편이 나운규, 오른편이 김태진 <아리랑> 제작 기념 사진. 앞줄 중절모 쓴 이가 주인규 그 왼편이 나운규, 오른편이 김태진
 

먼저 나운규는 누구인가, 연보를 통해 알아본다.

나운규 연보

1902년(1세)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약종상 나형권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17년(16세) 조정옥과 결혼
1918년(17세) 간도(명동중학교)입학. 장남 종익 출생
1919년(18세) 3.1운동 당시 회령 만세사건 주동자로 활동.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피신
1920년(19세) 딸 신자 출생.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비밀조직 도판부 가입. 서울(중동학교) 입학

1921년(20세) 중동학교 재학 중 도판부사건 혐의자로 체포됨. 보안법 및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됨(3월 5일). 감옥에서 독립투사 이춘식으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음
1923년(22세) 만기출소(3월 5일) 후 회령으로 돌아옴. 극단 예림회에 가입(12월)
1924년(23세)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
1925년(24세)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 영화에 데뷔함. <심청전>(윤백남프로덕션)에 심봉사 역으로 출연

1926년(25세) <장한몽>(계림영화협회)에 출연. 촬영 도중 화재사고로 부상(2월).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 입사. <농중조>에 출연. 대중적 인기를 얻음. <아리랑>의 원작ㆍ감독ㆍ각본ㆍ주연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음. <풍운아> 각색ㆍ감독ㆍ주연
1927년(26세) <아리랑>ㆍ<풍운아>가지고 고향에 감. <야서>(들쥐)원작ㆍ각색ㆍ주연 윤봉춘이 이 영화로 배우활동을 시작함. <흑과 백>(김택유영화사)에 조연
 <금붕어> 각색ㆍ감독ㆍ주연 〈조선키네마프로덕션〉 탈퇴, 나운규가 중심이 된 〈나운규프로덕션〉설립. 제1회 작으로 <잘 있거라> 제작 (원작ㆍ각색ㆍ감독ㆍ주연)
1928년(27세) <옥녀>제작. <사랑을 찾아서> 제작. <사나이> 제작
1929년(28세) <벙어리 삼룡> 제작.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1930년(29세) '찬영회' 사건에 연루됨. <아리랑 후편>(원방각사)주연. <정인도>(원방각사) 주연미나도좌 연극부에서 연극 공연 

1931년(30세) <금강산>(도야마프로덕션) 주연. <남편은 경비대로>(도야마프로덕션) 출연
1932년(31세) <개화당 이문>(원방각사) 감독ㆍ주연. <임자없는 나룻배>(유신키네마) 주연
1933년(32세) <종로> (대구영화촬영소)주연
1934년(33세) 극단 '형제회'(성원 일행)에 소속되어 지방순회 공연. <칠번통소사건>(조선키네마사)주연ㆍ각본ㆍ감독
1935년(34세) <무화과> (조선키네마사)
1935년(35세) <아리랑 제3편>(발싱) <오몽녀> 각색ㆍ감독ㆍ미발표 시나리오 <황무지> 집필
1936년(36세) 8월 9일 오전 1시 20분 세상을 떠남. 영화인장으로 영결식을 치름 (주석 1)

주석
1>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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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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