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장벽이 부른 오해, 비극이 된 아메리칸 드림
[이준목 기자]
1915년 영국 만화가 윌리엄 엘리 힐이 미국의 한 잡지에 처음 게재했던 '나의 아내와 시어머니'라는 그림은 이른바 '착시 효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그림 속 인물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개를 돌리고 갸날픈 턱선을 지닌 젊은 여성(아내)으로, 혹은 큰 코와 우울한 눈빛을 가진 노인 여성(시어머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이 그림을 활용한 테스트 결과, 세대차에 따라 젊은 참가자들의 눈에는 젊은 여성, 나이든 참가자들의 눈에는 늙은 여성의 모습이 먼저 보이는 차이가 나타났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보는 사람의 나이와 사회적 배경이 똑같은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데 있어서 차이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로 자주 활용된다.
아들을 잃은 한 엄마가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하필 낯선 땅에서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이방인 엄마의 고백은 '내가 아들을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는 그녀의 이미지를 '아들을 죽인 괴물'로, 누군가는 아들을 잃고 억울하게 삶까지 망가진 '비련의 여인'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그녀의 진짜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이방인 엄마의 살인 고백, 295호의 비밀' 편을 통하여 1987년 아들 살인 누명을 써야했던 윤미정(가명) 씨의 사건을 조명했다.
이야기는 1987년 5월 28일, 새벽 3시 40분, '그날'로 되돌아간다. 경찰서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우리 애 좀 살려주세요. 애가 숨을 안 쉬어요"라는 다급한 호소가 들려온다. 발신지는 노스캐롤라이나 잭슨빌에 위치한 콜로니얼 호텔 2층 295호, 가난한 사람들이 달방 생활을 하는 여관 같은 곳이었다.
신고자는 바로 윤 씨였다. 출동한 경찰과 구조대는 가장 먼저 울고있는 윤 씨를 마주했다. 침대에는 윤 씨의 두 아이가 있었고 딸은 조용히 잠들어 있었지만 아들은 피를 흘리며 맥박이 정지한 상태였다.
경찰은 윤 씨에게 사고 경위를 물었다. 윤 씨는 일을 하고 새벽에 숙소로 돌아왔더니 침대에 막내딸만 자고 있어 큰 아들을 찾으려 주변을 살피니 바닥에 TV와 서랍장이 쓰러져 있고 아이가 그 밑에 깔려 있었다고 고백했다. 만 2세였던 아들은 평소에도 TV채널을 돌리려고 서랍장을 열어서 그 위에 자주 올라섰었고, 서랍장이 엎어지며 TV까지 같이 쓰러져서 아이를 덮친 사고사라는 것.
하지만 경찰은 윤 씨의 진술에서 수상한 기색을 느꼈다. 당시 경찰이 촬영한 사고현장 사진에서는 TV도 서랍장도 원상복구 되어있었고 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엄마인 윤 씨가 아이가 죽었는데도 한참 후에 신고했고 그 전에 현장을 치워두기까지 한 것. 게다가 아이의 몸에는 TV에 깔렸다는 머리보다도 오히려 몸에서 수상한 상처들이 다수 발견됐다.
경찰은 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신원조회를 한 결과 두 아이 모두 출생신고를 하지않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드러났다.
경찰은 윤 씨의 학대로 아이가 죽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경찰이 윤 씨가 범인임을 확신하게된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그녀의 자백이었다. 윤 씨는 경찰서에 잡혀가면서 출동 경찰들에게 "내가 죽였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이것 말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뒤 열린 재판에서 윤 씨는 "나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면서 진술을 번복한다. 아동학대를 추궁하는 검사를 상대로 윤 씨는 삿대질을 하면서 설전을 벌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재판 내내 흥분하고 감정이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윤 씨의 이런 태도는 오히려 배심원들의 의구심만 부추겼고 결국 재판에서 만장일치 유죄판결을 받으며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윤씨는 억울함에 항소를 신청했지만 이마저 기각당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사건은 2년뒤인 1989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활동하던 한인 변호사 서승해 씨를 통하여 다시 재조명 받게 됐다. 서 변호사는 한인 상점을 돌며 영업을 하다가 우연히 윤씨의 사건을 접하게 되었고, 그녀가 감옥에서 억울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같은 한국인이라는 동질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서 변호사는 윤 씨를 찾아가 그녀의 눈물과 절박한 표정을 보고 처음 만난 순간 '뭔가 잘못된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서 변호사는 윤 씨가 묵었던 콜로니얼 호텔을 찾아가 주인을 만났고 "윤 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윤 씨는 처음 홀로 아이 둘을 데리고 나타나서 여기에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했고, 호텔 주인은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서 방도 내주고 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취직도 시켜줬다.
주인은 "그녀는 믿음직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었다. 웬만한 부모보다 아이들을 잘 돌봤다"고 회상하며, 가게의 금고 열쇠까지 맡겼을 정도로 윤 씨를 신뢰했다. 또한 주인은 윤미정의 아래층에 살고 있었고 사건 당일 저녁 9시 크게 쿵하는 소리가 났다고 증언했다.
서 변호사는 재판 기록을 다시 검토하면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한다. 윤 씨는 영어가 서툴렀고 경찰 조사 때부터 재판까지 의사표현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통역'이 아예 없었다. 윤 씨는 상대의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짧은 영어 때문에 같은 말만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횡설수설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미 자신을 범인이라고 단정하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시선들과,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에는 귀기울여주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그녀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인 교민들은 그녀가 억울하게 감옥에 갔을 수 있다는 의구심과 함께 동양인 차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알려져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5년째 복역중인 윤 씨를 직접 교도소로 찾아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윤 씨는 사건 당시 방을 치워서 경찰의 의심을 샀던 행동에 대하여, "미국에서는 방이 지저분한 것도 아동학대(Child abuse)로 취급하기 때문에, 이걸 문제삼아 혹시 우리 딸을 미국 정부에서 데려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아들이 죽었는데도 딸을 뺏길까봐 먼저 걱정했다는 것은 이해가 될듯말듯 미묘한 이야기다.
윤 씨에게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충남 서산으로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형편이 어려웠다. 윤 씨는 우연히 읽어본 오빠의 일기에서 홀어머니와 동생(윤미정)이 없었다면 죽고 싶다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아 가출했다. 생계가 막막했던 윤 씨는 미국으로 시집가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군 부대 근처 기지촌으로 향했다.
기지촌은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과 함께 생겨났으며 옷가게, 음식점, 술집 등이 모여있던 마을이었다, 윤씨가 기지촌에 들어간 것은 1976년으로 당시 주한미군 협력과 외화벌이를 위하여 기지촌을 국가에서 관리했다. 당시의 윤 씨에게는 오늘날의 여성들처럼 안정된 환경이나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기지촌 여성들이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군을 잘 만나서 결혼하여 미국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아메리칸 드림'이었다.
한국중앙연구원에 따르면 1970~1980년까지 미군과 결혼한 여성은 평균 4000여 명에 이르렀다. 윤미정 씨 역시 한 미군을 만나 딸을 낳고 미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당시 그녀의 나이 스무살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녀의 아메리칸 드림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윤 씨는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남편들은 모두 마약 중독자였고 폭력까지 행사했다. 윤 씨는 이혼을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첫째 딸의 양육권까지 뺏겼다.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두 아이마저 뺏길까 두려웠던 윤 씨는, 남편 몰래 도망쳐 콜로니얼 호텔이 있는 시골마을로 숨어들었던 것이었다.
그날의 가슴아픈 진실이 드러났다. 윤 씨는 평소 아이들이 있는 방문을 잠그고 TV를 켜둔 채 일을 나섰다. 혹시라도 누가 아이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신고할까봐서였다. 어떻게든 아이들만은 지키고 싶었던 엄마의 간절함이었다. 그녀가 퇴근했을 때는 이미 아이는 서랍장에 깔려 숨을 거둔 상태였다.
안타깝게도 윤 씨는 처음엔 자신이 왜 수감되어있는지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툰 영어 때문에 그녀는 살인죄가 아니라 베이비시터를 두지 않고 일하러 나간 것 때문에 자신이 수감되었다고 착각했던 것.
또한 그녀가 체포된 결정적인 이유였던 "내가 아들을 죽였다. 내 잘못이다(I killde my son, it's my fault)"이라는 이야기는, 살인을 자백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 정서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지 못한 엄마의 자책감이 묻어난 넋두리였다.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생겨진 오해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은 것.
서 변호사는 계속된 비협조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찰과 검찰의 부실수사들을 하나둘씩 밝혀나갔다. 서 변호사는 현장 상황 재현을 통하여 아이와 TV의 무게가 합쳐지면서 서랍장이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서랍장이 쓰러지면서 주저앉은 아이의 하반신은 서랍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의식을 잃은 가운데 상반신이 서랍장에 눌리는 상황이 되면서 아이가 질식하게 된 것.
서 변호사는 재심 신청을 했지만 미국 법원은 자신들의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꺼렸기에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요청을 거부했다. 서 변호사는 고심 끝에 한인사회와 협력하여 윤씨의 '사면'을 청원하는 구명운동을 펼쳤다. 소문이 알려지면서 여성계와 아시아 사회에서도 윤 씨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92년 10월 30일, 윤씨는 비록 사면은 아니었지만 가석방 처분을 받아 마침내 감옥을 벗어나게 됐다. 끝내 무죄를 완전하게 입증받지는 못했지만 자유를 되찾은 것에 대하여 윤씨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찾아 윤씨를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윤씨는 가석방 기간동안 교회에서 운영하는 쉼터에서 생활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윤 씨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 윤 씨는 그날의 사건 이후 생이별하게 되었던 딸과 10년만에 딸과 재회했지만, 너무 어릴 때 헤어진 딸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언어의 장벽으로 대화도 잘 통하지 않아 서먹서먹하게 헤어져야 했다.
윤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가슴아픈 것은 내가 왜 미국 사람이 아닌가. 나는 왜 영어를 잘 모르는가. 나는 왜 세상에서 뒤떨어져 있나"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조그만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나온 것 같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어렵게 밖으로 나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녀에게 감옥같은 현실이었다.
이후 윤 씨의 후일담도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는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경범죄로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고, 2006년 결국 미국에서 추방 처분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윤 씨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던 이호섭 감독은, 취재하면서 그녀가 출옥한 이후에도 평탄하지 않은 삶을 보냈음을 알게 됐다.
이 감독은 윤 씨의 삶이 무너진 이유에 대하여 "살면서 가장 힘든 고통이 자식을 잃는 것 아니겠나. 어느 순간까지는 딸과 함께 살기 위하여 꿈꾸던 동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미정 씨는 아들이 죽을 때 같이 돌아가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밝혔다.
윤씨가 하루아침에 아들을 잃고, 언어의 장벽으로 두 딸과의 관계도 점점 소원해지면서 삶의 희망을 잃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추방 당일, 이 감독이 촬영한 사진에서 윤 씨는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듯한 공허한 표정을 짓고 있다.
10여 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모든 것이 변해있었고 가족과도 단절된 윤 씨는, 미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이방인의 심경을 느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021년 12월 21일, 윤 씨는 만 61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지병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지자체의 도움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쓸쓸하게도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보기 위하여 찾아온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쯤 겉도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있다.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경계선의 회색의 순간, 어느 한쪽에도 온전히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이방인의 상황. 그저 평범한 행복을 찾기 위하여 미국을 찾아왔던 윤미정 씨가 그 희망이 하나씩 무너져내리는 순간들을 보면서 느꼈을 절망감은 어땠을까.
왜 죄없는 그녀가 그토록 잔혹한 운명을 겪어야만 했는가. 어쩌면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난 한 여성이 아메리칸 드림에 의지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당시 우리 사회의 현실과 한계가 만든 비극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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